▽핵폭탄급 내용이 담겼나=우선 테이프와 녹취록에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이며, 이들이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공 씨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안기부에서 미림팀을 이끌면서 정계 재계 관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의 대화를 불법으로 녹음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는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 금융실명제 실시, 한보그룹 부도, 외환위기 등 국가적으로 큰 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사의 대화를 집중적으로 도청했을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정책 결정 및 인사의 과정, 정파 간의 물밑 접촉과 암투, 기업의 로비 행태, 유명 인사의 사생활 등이 고스란히 담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인지 벌써부터 시중에는 모 대기업 간부와 유명 정치인의 녹취록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공 씨는 “우리 사회는 전 분야에 걸쳐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아첨, 중상모략, 질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라고 자술서를 통해 말한 적이 있다. ‘음지(陰地)’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단면이 어땠으며, 그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게 한다.
1999년 두 박스 분량의 테이프(200여 개)와 녹취록을 공 씨로부터 반납 받았다가 소각한 이건모(60) 당시 국정원 감찰실장의 반응은 더 적나라하다.
그는 “박스 개봉 순간 소름이 끼쳐 ‘이런 내용이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회수하는 척만 하고 말걸’이라는 후회 등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도청 자료가 공개되면 상상을 초월하는 대혼란을 야기하고 모든 분야에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테이프 공개 시 파장이 엄청날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테이프는 없나=공 씨에게서 압수한 테이프가 국정원에 반납한 테이프의 복사본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것인지는 검찰이 밝히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것 외에 또 다른 테이프가 존재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공 씨는 “1993년 잠시 중단됐던 미림팀이 이듬해 재건됐을 때부터 훗날을 위해 테이프를 밀반출해 왔다”고 말했다.
전체 테이프 중 앞으로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인사나 공개됐을 경우 파장이 클 내용만 선별적으로 밀반출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공 씨가 국정원에 반납한 자료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내용을 담은 테이프이며 김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내용은 따로 숨겨두었는데 이번에 검찰에 압수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나온다.
이런 맥락에서 이 전 실장이 테이프 반납 당시 천용택(千容宅) 전 국정원장에게 “당장은 활용도가 크겠지만 자칫 국가에 큰 화를 끼칠 수 있다”고 건의한 부분이 주목된다.
공 씨는 압수수색 같은 상황에 대비해 ‘제3의 장소’에 다른 자료를 보관했을지 모른다. 정보기관에 30년 가까이 근무한 공 씨가 불법 도청 자료를 모두 집이나 사무실에만 보관했을 것이라고 믿는 전·현직 국정원 직원은 많지 않다.
또 통상 4명으로 운영된 미림팀에서 팀장인 공 씨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의 팀원이 수시로 교체됐기 때문에 이들이 개인적으로 테이프를 밀반출했을 수도 있다.
검찰이 이번에 압수한 테이프와 녹취록을 확인하겠다고 밝힌 만큼 그 내용이 정리-취합-보고 되는 과정에서 민감한 내용이 다시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누가, 어떤 자료를, 어떤 형태로 보관 중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안기부 X파일’의 파괴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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