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천마총 금관 발굴

  • 입력 2005년 7월 28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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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발굴의 저주는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만 국한된 일이 아닌 듯했다. 경북 경주 천마총의 발굴이 시작된 1973년 여름. 전국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예년에 볼 수 없던 메마른 더위가 지속되자 경주 일대에는 ‘멀쩡한 왕릉을 파헤쳐 하늘이 노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일부 시민들은 발굴 현장에 와서 조사를 중단하라고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상황이 이러니 발굴단원들도 심정이 편했겠는가. 초조한 마음으로 천마총의 흙더미를 쓸어내리던 발굴단원들이 금관을 발견한 기쁨도 잠시. 유물상자에 넣기 위해 금관을 들어올리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인부들은 혼비백산해 현장사무실로 도망쳤다.

난데없는 비바람은 발굴단이 금관을 유물상자에 옮기고 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쳤다고 한다. 며칠 뒤 가뭄도 해소됐다. 금관이 1000여 년 세월의 지하 유폐를 끝내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그 나름의 진통이 필요했나보다.

그해 7월 28일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공개한 천마총 금관은 1000년이 넘는 긴 잠을 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그때까지 발굴된 금관 중 가장 크고, 견고하고 좋은 질의 금을 썼으며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도 두꺼웠다.

한국은 ‘금관의 나라’라 할 만하다. 세계에 알려진 고대사회의 금관은 다 합해서 10점에 불과한데 그중 7점이 한국에 있다. 또 금관 출토는 신라 고분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신라를 제외하고 금관이 발견된 것은 가야가 유일하다.

하지만 신라의 금관이 누구의 것이고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천마총 금관의 경우 신라 22대 지증왕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분명하진 않다. 또 그 용도에 대해서도 장식이 거추장스럽고 구조도 약해 일상용이라기보다 의례용 혹은 장례용이라는 해석이 대세다.

특히 금관이 들어있던 5∼6세기 적석목곽분의 구조, 금관의 주요 장식이 알타이 고분 출토품과 유사하다는 점 등으로 미뤄 이들 금관이 신라가 알타이 지방을 중심으로 시베리아 동서를 관통한 고대 황금문화권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는 해석이 많다. 신라는 닫힌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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