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황호택]‘킹메이커’ 신문

  • 입력 2005년 7월 28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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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대통령 선거에서 ‘킹메이커(King-maker)’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상업언론의 역사가 긴 유럽과 미국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신문은 할 수 있고 방송은 할 수 없다’이다. 구미(歐美) 국가에서 방송은 공중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기 때문에 선거보도에서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신문의 특정 정당 혹은 후보 지지는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사설(社說)을 통해 특정 후보를 지지한 신문일지라도 기사는 중립을 지킨다.

미국에서 널리 읽히는 ‘USA 투데이’는 1982년 창간 이래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USA 투데이’의 창립자인 알 뉴하스(78) 씨는 “신문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게 되면 기사를 공정하게 쓰더라도 독자로부터 공정성을 의심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대선 직전 “신문이 독자에게 받아쓰기를 시켜서는 안 된다. 신문사의 의사 결정자들이 신문 스스로와 독자의 이익을 위해 킹메이커 역할을 중단해야 한다”고 일부 신문을 비판했다.

작년 미국 대선에서 1456개 일간지 가운데 291개가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지지선언을 하지 않은 신문이 훨씬 많은 셈이다. 미국의 최고 권위지인 ‘뉴욕타임스’는 존 케리 상원의원을 지지하는 통사설을 썼다. 케리 후보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패배했지만 그렇다고 ‘뉴욕타임스’의 권위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 언론은 공직선거법 상 특정 후보를 지지할 수 없다. 1997년 대선 혹은 2002년 대선에서 각 매체의 보도 경향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그 정도는 어디까지나 편집권의 재량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비밀도청팀장이 SBS와의 인터뷰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SBS MBC KBS 다 똑같다”며 “우리 같은 사람을 흥분시키면 언론에 재갈 다 물려 놓을 거야”라고 협박했다. 얼굴을 감추고 ‘제 정신이 아니야’ ‘정말 역겨워’ 같은 막말을 하더니 종국에는 자해 소동을 벌였다. 어쨌거나 불법 도청을 일삼던 정치공작대 시절의 버릇을 못 버리고 핵폭탄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협박하는 태도가 ‘정말 역겹다’.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는 정보 맨의 직업윤리는 간 곳 없고, 남의 이야기를 엿들어 협박하고 거래하는 수법만 배운 것 같다.

‘X파일’에 연루된 인사가 사장으로 있던 신문은 도청팀장의 인터뷰를 풀어 쓰면서 ‘한쪽 초상났다고 좋아서 그러지 마라. 다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았다. 무엇이 다 똑같고, 다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든 언론기관의 회장 사장이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특정 후보 캠프 사람을 만나 수십억 원대의 돈 가방을 전달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체면조차 잃은 ‘물귀신 작전’ 아닌가. 이번 사태로 한국 언론 전체가 신뢰를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공직선거법을 개정한다면 한국 신문도 자유롭게 지지 후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신문이 지향하는 가치에 부합되는 후보를 골라 지지 선언을 하더라도 신문의 ‘킹메이커’ 역할에는 넘어서는 안 될 금단(禁斷)의 선이 있는 법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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