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2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7월 2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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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공의 드높은 의기를 떠올리고 또 지금의 고단한 공의 처지를 살피니 실로 과인의 가슴이 아프오. 한왕 유방을 위한 충성은 이만하면 넉넉히 보여준 셈이니, 이제부터는 과인을 위해 일해 보는 게 어떻소? 만일 공이 우리 초나라로 돌아온다면 과인은 공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3만 호의 식읍(食邑)을 내리겠소.”

패왕은 홍문의 잔치에서 번쾌를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정감으로 그렇게 주가(周苛)를 달래 보았다. 그런 패왕에게는 이긴 자의 너그러움만큼이나 힘 있고 굳센 자의 자신만만함도 은연중에 작용하고 있었다.

‘뼈에 피와 살을 입힌 인간의 몸은 신념이나 대의를 싣기에 얼마나 허약한가. 인간은 고통 앞에 얼마나 무력하며 죽음 앞에 얼마나 비굴해지는가. 너는 한때의 허영으로 충성이니 신의(信義)니 하며 함부로 목숨을 내걸었지만, 이제 네 몸과 마음은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아울러 벌벌 떨고 있을 것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되돌릴 길 없고, 이제 와서 차마 목숨을 애걸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너는 길이 있으면 그 고통과 죽음을 피해가고 싶을 것이다. 그 길을 내가 터주겠다. 나는 이제 네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복할 수 있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내 손을 잡아라. 황송스럽게 감격해서. 그렇게 해서 네가 지난날에 내게 입혔던 상처를 영광과 위엄으로 덮어다오.’

그런데 주가의 대답은 그런 패왕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패왕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패왕을 쏘아보다가 차갑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이놈 항적아. 네 눈은 가죽이 모자라 찢어지고, 네 귀는 머리뼈가 모자라 뚫린 것이라더냐? 지난날 내 벗 기신(紀信)이 제 한 몸을 장작불에 태워가며 네게 보여주고 일러주었거늘, 네 어찌 유가(儒家)의 충의를 이리도 작고 낮게 보느냐? 네 그러고도 남의 임금 되어 천하를 다투려 하느냐? 아서라.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빨리 우리 대왕께 항복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 대왕께서 너를 사로잡아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조차 누릴 수 없게 되리라. 너 같은 것은 결코 우리 대왕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마치 어찌하면 패왕이 가장 성낼까를 헤아려 하는 소리 같았다. 패왕도 필요하면 참을 줄도 알았으나 그런 주가의 말을 듣자 더 달래볼 마음이 없어졌다. 모처럼 펼쳐 보인 자신의 너그러움을 주가가 모질게 마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해까지 온전히 무시하자 온몸이 분노로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잠깐 주가를 무섭게 노려보다가 짐짓 목소리를 낮춰 차갑게 말하였다.

“주가는 듣거라. 너는 아무래도 이 세상과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못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네가 꿈꾸고 있는 그런 세상과 믿고 있는 그런 휘황한 대의란 없다. 그것들을 담을 수 있는 얼도 없고, 그 얼을 끝내 지켜낼 수 있는 몸은 더욱 없다. 시황제는 일찍이 너희 같은 무리를 모두 땅에 파묻어 육국혼합(六國混合) 일통천하(一統天下)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과인은 지난번에 기신을 태워 천명을 거스르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온 세상에 보여주었거니와, 이제는 또 너를 삶아 과인과 우리 서초(西楚)에 드리운 천명의 엄숙함을 다시 한번 온 세상에 드러내려 한다. 뜨거운 가마솥 속에서라도 네가 실로 어디에 사는 무엇인지를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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