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이태동]조지 오웰의 ‘1984년’과 한국의 ‘1997년’

  • 입력 2005년 7월 26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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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에 바탕을 둔 정치우화 ‘동물농장’을 쓴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가 미래에 전체주의적인 경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신격화된 ‘빅 브러더(大兄)’가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권력기관에 의한 개인생활의 감시와 통제, 사상의 억압 등과 같은 초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치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공산주의 전제정치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출현 가능한 모든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 소속의 ‘미림’팀이 사회 유력인사의 사생활을 은밀히 도청하여 보관해온 녹음테이프가 공개되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에 휩싸여 있다. 이미 대화 당사자의 실명까지 공개되어 버린 이 녹음테이프에는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장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1997년 대선 당시 대선주자들과 검찰조직에 금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나눴다는 대화를 도청한 내용이 들어 있다.

어두웠던 시절, 저간의 사정이야 어떠했든, 대기업 고위 관계자와 사회의 소금 역할을 해야 할 주요 일간지의 사장이 불법 정치자금 지원을 논의했다는 것은 지극히 온당치 못하다. 특히 당시 정치권 등의 강압이 없었는데도 기업 스스로가 거액의 돈을 제공하려고 했고, 그룹 회장의 개입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으며, ‘기아차 인수’ 등 대가성을 암시하는 대목이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이고 전근대적인 병폐인 ‘정치뇌물’ 성격이 짙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정경(政經) 유착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말고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조지 오웰이 그토록 경계했던 지배계급의 전체주의적 통제와 그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되는 국민들의 사생활 보호문제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초원복집 사건’처럼 그동안 우리 사회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불법도청이 자행된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러나 암울했던 군사정권도 아닌 ‘문민정부’ 시절에 불법도청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참여정부 아래 살고 있지만 아직도 개인의 사생활이 낱낱이 노출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부 언론은 ‘도청된 내용’에만 무게를 두면서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불법도청’이라는 범죄에 대한 비판과 경계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인상을 주고 있다. 또 ‘왜 그 녹음테이프가 10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 공개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사람도 있다.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만에 하나 이 테이프를 언론에 공개한 측이 어떤 정치적인 음모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국민이 전화통화는 물론 사사로운 모임에서 정담도 자유롭게 나누지 못할 정도로 위협을 느낀다면 우리는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건은 정경유착과 같은 고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에 의해 행해지는 불법도청과 같은 폭력적 관행을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년’에서 그린 첨단통신기술을 사용해 국민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오세아니아’와 같은 가공할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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