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보다 증오 푸는게 더 중요하죠”

  • 입력 2005년 7월 25일 03시 06분


코멘트
법원의 역할은 범죄를 처벌하는 것뿐일까. 법원이 범죄 피해자가 본 정신적 상처까지 치유할 수는 없을까. 서울고법에서 범죄 피고인(가해자)에게는 ‘용서를 빌 기회’를,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현대 사법이론의 하나인 ‘회복적 정의’의 한국판을 모색 중인 셈이다. 서울고법의 한 재판 광경(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없음). 동아일보 자료 사진
법원의 역할은 범죄를 처벌하는 것뿐일까. 법원이 범죄 피해자가 본 정신적 상처까지 치유할 수는 없을까. 서울고법에서 범죄 피고인(가해자)에게는 ‘용서를 빌 기회’를,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현대 사법이론의 하나인 ‘회복적 정의’의 한국판을 모색 중인 셈이다. 서울고법의 한 재판 광경(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없음). 동아일보 자료 사진
《현대 형법과 형사정책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형벌과 정의(正義)에서 ‘처벌과 응보(應報)’ 외에 ‘치료와 화해’의 개념이 도입되고 있다는 점. 범죄를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흠 또는 잘못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의 한 흐름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회복적 정의’ 개념이다. 범죄로 인한 피해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서로 만나게 하는 ‘피해자-가해자 조정 제도’도 이를 위한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게 되고 피해자는 ‘왜 내가 범죄의 대상이 되었나’하는 의문을 직접 풀고 적절한 배상 기회를 갖게 된다. 서울고법의 한 재판부가 이 같은 ‘회복적 정의’를 최초로 시도하고 있다. 이 실험은 범죄와 형벌, 더 나아가 정의의 개념과 사법제도의 변화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돌아가신 어머니(범죄 피해자)도 자식들이 피고인을 용서하고 마음속 앙금을 지워 편안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을까요?”(재판장)

“피고인이 살해한 제 어머니는 하늘에서 피고인이 엄하게 처벌 받기를 원하실 겁니다. 그래야 우리 남매가 더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피해자 아들)

19일 오후. 서울고법의 한 형사법정에서 재판장과 피해자의 아들이 나눈 대화다.

○ “죄 지은 자도 용서받을 기회를”

법정에서는 올해 2월 A(사망 당시 49세·여)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강도살인 등)로 1심에서 징역 20년이 선고된 피고인 정모(39) 씨의 항소심 선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형 선고 대신 뜻밖의 장면이 이어졌다.

재판장인 서울고법 형사2부 전수안(田秀安) 부장이 정 피고인에게 물었다.

“1심 판결이 난 뒤 피고인의 가족이 1000만 원을 피해자에 대한 합의금으로 공탁했는데 피고인은 피해자 유족에게 직접 용서를 빌어 보려고 했나요?” 정 씨는 고개를 저었다.

“돈도 중요하지만 유족들은 왜 피고인이 ‘한번도 용서를 구하러 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전 부장은 피고인이 머뭇거리자 방청석을 둘러보며 피해자 유족을 찾았다. 피해자의 자녀 3남매 중 막내아들인 20대 초반의 M 씨가 일어섰다.

○ “피해자 유족은 앙금 풀 기회를”

M 씨의 대답은 재판장의 기대와 달랐다.

“어머니께서 살아 돌아오시지 않는 한 피고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엄하게 처벌받아야 저희 자식들도 마음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 씨는 울먹거렸다.

재판장은 다시 피고인 정 씨에게 말했다.

“피해자 유족들이 아무리 강경하게 피고인을 거부해도 용서를 먼저 비는 것이 가해자의 도리입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빌고 마음으로 받는 겁니다.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드리기 위해 선고를 8월 9일로 연기합니다.”

○ 새로운 시도, 제도화가 과제

대법원의 한 판사는 전 부장의 시도를 “매우 의미 있는 실험”이라고 말했다.

범죄의 예방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중형을 선고하는 것 못지않게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갈등과 앙금을 해결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형사재판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대화와 협의를 주선하는 조정제도가 20여 년 전부터 일반화돼 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도 “우리도 사법개혁의 하나로 비슷한 형태의 제도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 사건의 선고는 다음 달 9일 오전 10시에 이뤄진다. 본보 ‘법·사람·세상’은 이 ‘실험’의 결과를 보도할 계획이다. 피고인이 피해자 유족에게 용서를 구했는지, 피해자 유족은 피고인을 용서했는지, 아니면 여전히 피해자 유족들의 마음에는 피고인에 대한 증오만 남아 있는지를 독자께 알릴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미국의 조정제도는▼

“미국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조정제도는 폭행 절도 등의 범죄뿐만 아니라 살인, 살인미수, 가정폭력, 성폭행 사건 등 이른바 강력범죄에도 적용된다.”

미국 인디애나대 법학박사 과정의 장원경 박사가 지난해 7월 대법원에서 발표한 ‘회복적 정의 개념에 기초한 미국의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조정제도’라는 논문 내용의 일부다.

논문에 따르면 미국의 ‘피해자와 가해자 조정제도’는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됐지만 1990년대에 몇몇 주의 형사소송법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현재 20개 주가 입법을 검토 중이다.

장 박사는 1996년 미국 연방법무부 피해자국의 조사결과를 인용해 미국에는 289개의 조정기관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 가운데 116개 기관을 조사한 결과 한 기관이 연평균 106건 정도의 사건을 조정하고 이 사건 가운데 87%인 연평균 92건의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조정합의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조사결과 이렇게 작성된 조정합의서 중 평균 99%의 합의 내용이 그대로 이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장 박사는 밝혔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