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우혜]황실용어 제대로 쓰자

  • 입력 2005년 7월 2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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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사회가 지닌 큰 문제 중 하나가 우리의 과거 문화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성(京城)'이라는 지명은 '수도인 성'이란 뜻으로서 조선조 개국 초기에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쌓던 때부터 이미 관용적으로 쓰기 시작했기에 "조선왕조실록"에 수천 번 등장한다. 선조가 임진왜란때 영의정 유성룡에게 이순신의 출신지역을 물을 때 "그는 경성(京城) 사람인가?"("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7일조)라고 묻자 유성룡이 "그렇습니다"고 대답했던 것이 바로 그런 사례들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부분의 국민들이 '경성'은 1910년의 일제 강점 이후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쓰였던 왜색 잔재에 불과한 지명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왜색 잔재를 깨끗이 쓸어내기 위해서는 '경부선'의 '경'자도 바꾸어야 한다"고까지 격분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일제가 한일합방 뒤에 서울을 '경성(京城)'이라고 부르게 한 것에는 다른 까닭이 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서울의 별칭이 '황성(皇城)'이었다. 왕국이었던 조선시대와 달리 국격(國格)이 황제국으로 높아진 '대한제국'이 되었기 때문에 수도에 대한 관용적인 별칭 또한 '황제국의 수도'라는 의미인 '황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에 발간된 신문들 중에 제호에 '황성'을 넣은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어법이 그러했기에, 일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대한제국'과 직결된 관습적 지명인 '황성'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방편으로써, 서울을 관습어법으로서의 '경성'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 '경성'으로 부르게 했던 것이다.

국가 수립 초기부터 서울을 '경성'으로 자주 불러온 조선인들로서는 정서적으로나 관습적으로나 받아들이기 매우 쉬운 요구였기에 일제 강점기 내내 별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고유명사로 정착되고 사용되었다.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문 이름들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란 문 이름을 버젓이 있는데도 일제 당국이 격을 낮추어 부르게 하려고 굳이 '남대문'이나 '동대문'으로 부르게 해서 그런 호칭이 대중화된 것으로 아는 국민들도 많은데, 그 또한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해 보면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 칭호 또한 이미 태조때부터 관용어법의 하나로 흔히 쓰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런 사례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서울의 군사는 본 훈련관에서 주장하되, 남부는 남대문 밖에, 동부는 동대문 밖에 각각 사장(射場)을 축조하게 하고"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15조)

"선전관 이윤검을 보내어 동대문 밖에서 석전(石戰)하는 사람을 금(禁)하게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4년 5월 6일조)

"(경연에서) 시독관 이창신이 아뢰기를 '남대문에서 남소문에 닿도록 길이 남산 밑으로 둘려서 거마가 통행하며'" ("성종실록" 성종 12년 2월 8일조)

"(어우동 사건 관계로 임금에게) 지사 이극증이 아뢰기를 '수산수(守山守)는 남대문 밖에서 그네뛰기 하는 것을 만나 간통하였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13년 8월 8일조)

"간원이 아뢰기를, '동대문 및 남대문의 성 위에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하여…'" ("명종실록" 명종 10년 5월 22일조)

"(우포도대장 이한풍의 보고에) 동대문과 남대문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언문 서찰을 입직하는 금군(禁軍)에게 주었는데…" ("순조실록" 순조 1년 5월 20일조)

이처럼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란 호칭은 일상의 용어로서 궁중에서까지 흔하게 쓰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구체적인 제도의 명칭에도 들어갔다. 왕의 궁궐 밖 행차와 관련된 제도 중에 "남대문 봉도(奉導)"니 "동대문 봉도"니 하는 공식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들도 "남대문 안 김 서방 찾기"와 같은 속담을 잘 썼는데, 모두 일제의 강점기 이전의 일들이다.

최근 대한제국 황실의 적계로서는 마지막 혈손인 이구(李玖) 씨가 별세하여 그의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최후의 전통적 황실 장례식으로 치러지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조선조 5백년 왕조문화 최후의 잔영이 애잔하게 스러지는 것을 보는 감회가 컸다. 그런데 여기서도 전통문화의 중대한 왜곡 현상이 자행되어 크게 유감스럽다.

현재 전국의 각종 보도매체들이 모두 그를 가리켜서 '황세손(皇世孫) 이구'라고 지칭하고 있다. 장례를 주관하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그렇게 표기한 보도자료를 돌린 것을 아무런 고증이나 검증 없이 받아 쓴 것이다.

그러나 '황세손'이라는 칭호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해괴한 신조어로서, 이구 씨의 신분의 격을 크게 떨어뜨린 매우 그릇된 칭호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황통을 이어받았을 그의 신분을 바르게 드러내려면 반드시 '황태손(皇太孫) 이구'라고 써야 했다.

본래 동양의 왕조문화에서는 신분의 격에 따라서 사용되는 글자들이 매우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황실의 황위(皇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반드시 '태(太)'자를 넣고, 왕실의 왕위(王位)를 이을 후사에 대한 호칭에는 반드시 '세(世)'자를 넣는 게 법도였다. 그래서 황제의 아들은 황태자(皇太子)이고 황태자의 아들은 황태손(皇太孫)인 반면, 왕의 아들은 왕세자(王世子)이고 왕세자의 아들은 왕세손(王世孫)이다.

대한제국 시대에 '황태손'이란 칭호를 공식 사용한 사례가 있어, 그런 호칭문화의 실체를 극명하게 증언한다. 고종이 통치하던 광무 7년(1903)에 궁내부 안에 '황태손 강서원(皇太孫 講書院)'을 설치하여 12명의 관리를 배치했었다.("고종실록" 고종 40년 12월 6일조)

문제는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이다. 그들은 조선 왕가의 후예들로서, 왕조문화에 관한한 일반인들의 오류까지 바로잡아 주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오류들을 자주 범한다. 그들은 이미 이구 씨의 부친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李垠) 씨에 대한 호칭에서도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이은은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에 태어났기에, 태어날 때부터 그 신분이 '황제의 아들'이었고 1900년에 '영친왕(英親王)'에 책봉되었다.

여기서 먼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친왕'과 '왕'의 차이는 무엇이며, 그들과 '황제'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

'황제'와 '왕'은 그 격에 있어서 부자(父子)관계이자 군신(君臣)관계여서 1대의 차이가 있고, 황제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 하나를 뺀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왕'으로 책봉되었다.

'왕'에는 대략 네 종류가 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이 된 '왕'. 나라에 공을 세워서 그 상으로 황제로부터 '왕'으로 책봉받아 왕이 된 왕. 스스로 왕국을 세워서 왕이 된 '왕', '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된 왕.

이상 네 종류의 왕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왕은 당연히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왕이 된 왕들이다. 그래서 격이 낮은 다른 왕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굳이 '친왕(親王)'이라고 특별히 구분된 왕호(王號)를 사용했다.

당연히 대한제국의 황제의 아들로 태어난 이은이 받은 왕호 역시 '친왕'이었고, 왕호에 붙여준 이름이 '영(英)'이라서 '영친왕(英親王)'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확인해 보면, 고종 황제가 내린 조서나 각종 제도 등에 모두 '영친왕'이란 왕호가 쓰였음을 본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같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 쓰여진 당대 지사들의 저서에도 모두 '영친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은이 '영친왕'이란 왕호를 공식적으로 지녔던 기간은 길지 않았다. 책봉된 1900년부터 그가 새 황태자로 책봉된 1907년 8월 이전까지만 쓰였기 때문이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의 압력에 의해서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황태자였던 순종이 새 황제가 된 뒤인 1907년 8월에 영친왕 이은은 새 황태자로 뽑혔다.

황태자로 책봉된 뒤에 그가 지녔던 '영친왕'이란 왕호(王號)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 까닭은 '황태자'의 격이 '친왕'보다 더욱 높았기 때문이다. 왜 황태자가 친왕보다 격이 높은가. 황제의 아들이면 당연히 '친왕'이어서 동시에 '친왕'들은 여러 명일 수 있지만,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을 '황태자'는 오직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왕호 폐지 여부는 재산문제에도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순종실록"에는 그에 관련된 재미있는 기사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궁내부(宮內府) 대신 이윤용(李允用)이 "영친왕의 궁호가 이제 이미 폐지되었은즉, 그에 속한 재산은 어느 곳으로 옮겨서 소속시켜야 되겠습니까?(英親王宮號, 今已廢止, 則所屬財産, 移屬于何處乎)"하고 아뢰자 "경선궁(慶善宮)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명했다.

("순종실록" 순종 1년 8월 24일조)

경선궁은 이은의 생모인 엄귀비의 궁호(宮號)였다. 영친왕 이은이 황태자로 승격한 뒤로 새로이 황태자로서의 궁호와 재산을 갖게 되니까, 영친왕 시절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느냐고 궁내부 대신이 물은 것에 대해서 새 황제(순종)가 이은의 생모인 엄귀비에게로 보내 주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이 일제에 멸망하기 이전인 1907년 8월에 이미 이은은 황태자로 책봉됨으로써 '영친왕'이란 왕호를 폐기하여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고, 그런 신분으로 그 해 12월에 인질로 일본에 끌려갔다. 그래서 일본에 갔을 때 그의 신분은 당연히 '영왕'도 '영친왕'도 아닌 '대한제국 황태자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측은 현재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은은 본래 '영왕'으로 책봉되었는데 "일본황실이 예우의 명목으로 '영친왕(英親王)으로 칭호를 하였다"('선원세계')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역사의 실체와 다를 뿐더러, 시기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따져 보아도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미 '왕'이나 '친왕'보다 훨씬 존귀한 신분인 '황태자'가 된 이은에게 뒤늦게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친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영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째서 '예우'가 된다는 것인가.

일본측 기록을 고찰해 보면, 그들이 부른 이은의 호칭은 단지 세 가지였다. 1907년에 이은을 일본으로 끌어간 뒤 일본인들은 이은에게 꼬박 '대한제국 황태자 전하'라는 칭호를 썼다. 그러다가 1910년에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뒤부터는 '조선 왕세자 전하'라고 바꾸어 불렀다. 그리고 다시 1926년에 순종이 승하한 뒤에는 이은을 '조선 이왕(李王) 전하'라고 불렀다.

물론 그 세 가지 칭호 모두 '영왕' 또는 '영친왕'보다 훨씬 격이 높은 칭호들이다. 다만, 한 가지 일본의 황실 호칭문화와 직결된 기이한 관습어법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 동양의 왕조문화에서 보자면 궁벽한 변방지대였던 일본의 황실 호칭문화는 매우 정제되지 못한 것이어서, 어법상의 혼란이 꽤 있었고, 상당 부분에서 중국이나 조선의 궁중문화와 달랐다.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바로 황태자의 칭호 문제였다. 일본인들은 여러 친왕들 중의 하나가 황태자로 책봉된 경우, 친왕 시절의 왕호를 폐기하지 않고 그것이 마치 그 황태자의 고유 이름인 것처럼 그대로 붙여서 불렀다. 예를 들어, '가인 친왕'이 황태자가 되면 '황태자 가인 친왕 전하'라고 불렀고, 그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야 '아무개 친왕'이라는 칭호를 폐기하고 쓰지 않았다. 여러 황실 칭호들이 지닌 격의 높낮이의 차이에 둔감한 일본 궁중문화의 낮은 수준을 드러낸 사례 중 하나에 해당한다.

일본인들은 그런 자신들의 관습어법에 따라서 때때로 이은에 대한 호칭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 전하'라고 하거나 '조선 왕세자 영친왕 전하'라고 부르고는 했다. 물론 그들도 순종이 승하하여 이은을 '이왕 전하'라고 부르게 된 뒤부터는 그에게 '영친왕'이라는 칭호를 전혀 쓰지 않았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측은 당시의 실정이 이러했던 것을 모르고 지금도 "'영왕 이은'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은을 제대로 예우하는 칭호"라고 계속 주장한다. 그래서 '영왕 이은의 아들인 황세손 이구'라는 해괴한 칭호를 사용하여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오도하고 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오류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같은 동양의 왕조문화라 해도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크게 달랐다. 여러 면에서 중국과 조선의 경우는 매우 정교하고 계층문화로서의 세련된 격식을 지녔다는 점에서 일치하는데, 일본만은 크게 달랐다.

예를 들어, 사회적 공동체 생활의 가장 기초가 되는 '이름 짓기'를 보면 그 차이점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자고로 중국과 조선에서는 통치자의 가문에서는 물론이고, 개인들도 자신의 윗대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매우 꺼려서 같은 뜻을 지닌 다른 글자로 바꾸어 기록했었다. 그런 걸 "휘(諱)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에 사용된 항렬의 글자 하나만으로도 그가 대략 어느 시대 사람인지 쉽게 어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문화는 전혀 반대였다.

일본에서는 위로는 천황 가문으로부터 아래로 고위 벼슬아치거나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자식과 손자가 모두 이름에 같은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 식의 관습으로 보자면 조상과 후손이 모두 한 항렬의 형제들과 같은 형태의 이름을 지어 부르며 살았던 예가 흔하다. 그래서 덕천 막부의 장군가 인물들 이름을 보면 조부나 손자나 증손자의 이름이 한 형제의 이름과 같다.

1대: 덕천가강(德川家康, 본인)

2대: 덕천신강(德川信康, 맏아들)

3대: 덕천가광(德川家光, 손자)

4대: 덕천가강(德川家綱, 증손자)

황실이나 왕실 가족들에 대한 경칭인 '폐하'나 '전하'와 같은 경칭의 사용법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있다.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경칭법이 엄격해서 경칭만으로도 상대의 신분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황제(황후) 폐하·황태자(황태자비) 전하·왕(왕비) 전하·왕세자(왕세자빈) 저하"로 명확하게 갈린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달라서 경칭의 남발과 혼용이 심했다. "천황(황후) 폐하·황태자(황태자비) 전하·왕(왕비) 전하"까지는 같은데, "왕세자(왕세자비:일본에서는 왕세자의 부인에게 '빈'을 쓰지 않고, 왕의 부인과 동격인 '비'자를 씀)"에게도 '전하'를 붙인다. 심지어 왕족의 아래 계급인 공족(公族)들에게도 '전하'라는 경칭을 쓰게 하고 공족의 아내에게까지 '비'자를 쓰게 했기에, "아무개 공(公) 전하"니, "아무개 공비 전하"니 하는 칭호들을 썼다. 그 뿐 아니라 때로는 권력가인 신하에게도 '전하'를 붙이는 경우가 있었기에, 예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 시절에 이미 '전하'라는 경칭을 받고 지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통문화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우리의 고유 전통을 '왜색 잔재'라고 오해하여 말끔히 없애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일본의 전통문화 또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으로 우리 궁중 법도와 크게 다른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같은 일본식 호칭을 열심히 쓰고 있다. 다이애나의 경우, 그녀를 '황실 가족'으로 번역하려면 "황태자비"라 해야 하고 '왕실 가족'으로 번역하려면 "왕세자빈"이라고 해야 우리 전통문화에 일치한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에 대한 올바른 호칭은 무엇인가. 그의 시호(諡號)를 써서 '의민 황태자' 또는 약칭으로 '의민 태자'라고 부르는 것이 법도에 맞다. 그것은 왕이 되지 못하고 왕세자 시절에 별세한 이들, 곧 명종의 아들인 '순회 세자'나 영조의 아들인 '사도 세자'의 경우와 같은 호칭법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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