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마지막 장례' 폭염에도 수천 인파

  • 입력 2005년 7월 24일 16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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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씨의 장례가 엄수된 가운데 장례행렬이 종묘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
24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씨의 장례가 엄수된 가운데 장례행렬이 종묘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
'조선왕실의 마지막 장례'가 무더위속에서 치러졌다.

故 이구 씨의 영결식과 노제가 치러진 24일, 찌는 듯한 더위(33℃)에도 창덕궁과 종로 대로에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장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일반 시민들과 조문객, 운구행렬로 가득 찼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측 500여 명, 행사진행 600여 명, 일반 시민 2천여 명 등 약 3천여 명 이상이 이구 씨의 장례 행렬에 참가했다.

영결식이 치러지기 전 오전 9시 30분께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발인할 때 지내는 제사인 견전(遣奠)이 치러졌다. 견전 뒤 국방부의장대가 빈청이 차려진 창덕궁 낙선재에 도착했다.

육해공군에서 차출된 국방부의장대 병사 11명이 흰색 마스크를 쓴 채 고인의 유해가 담긴 관을 들고 나오자 축함(축문을 담아 황금색 보자기로 싼 상자)을 들고 있던 상복차림의 한 남자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관을 운구하고 있는 의장대 뒤로는 고 이구 씨의 양자로 결정된 이원(44)씨가 대나무로 된 상장(喪杖. 상주가 짚는 지팡이)을 짚고 따라 나왔고, 그 뒤로 그 아버지인 충길 씨와 이석 씨 등 유족과 장례위원회 인사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이구 씨 유해가 든 관이 창덕궁 희정당(보물 제815호)앞에 이르자 육군 의장대의 조악(弔樂)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인파로 지체된 영결식은 10시가 약간 넘은 시각부터 45분간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장례위원회 측 진행요원들이 상복을 입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저리 비키라"며 짜증을 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고인에 대한 묵념과 고인의 약력 소개, 이환의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장의 인사,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식사(式辭), 이해찬 총리의 조사(弔辭)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유족과 조객들의 분향이 이어졌다.

신문, 공중파, 케이블 등 각 언론매체 취재진, 그리고 낙선재에서 치러지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장례를 보기 위해 나온 시민들로 인해 낙선재와 희정당은 발디딜틈 조차 힘들었다.

간혹 일본인 관광객들을 비롯한 외국 관광객들이 눈에 띄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가족단위로 '조선왕실의 마지막 장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로 인해 탈진한 한 노인이 소방 구급대에 의해 들것으로 실려 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오전 10시 45분께 영결식이 끝나고 고인의 영정을 실은 캐딜락을 필두로 반차행렬은 희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에 이르자, 대기하고 있던 취타대 200여명과 수십여 기의만장(輓章)을 든 행렬이 반차행렬의 앞에 서 돈화문을 빠져나갔다.

창덕궁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인파들로 인한 차량 통제의 어려움에 캐딜락에서 꽃상여차량으로 고인의 유해를 옮겨 싣는 과정이 겹쳐지며 시간은 11시 30분까지 지체됐다.

돈화문에서 종로3가 로타리까지 이르는 길에서 많은 시민은 대규모 전통 장례양식이 신기한 듯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이날 운구 행렬은 취타대ㆍ만장행렬→영정 차량→위패를 모신 가마→유해를 실은 꽃상여 차량→운구용 캐딜락→상주를 비롯한 유족행렬 등의 순서로 노제가 치러지는 종묘 앞까지 진행했다.

종묘 3가 로타리에 11시50분께 도착한 반차행렬은 좌회전해 종로 대로 편도 4차로를 가득 채우고 종묘 앞으로 이어졌다.

종묘 앞에서 약 20여분간 노제를 치른 뒤, 행렬은 동대문으로 이동, 오후 2시예정이었던 유해 안장을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면의 영친왕 묘역으로 향했다.

디지털뉴스팀·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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