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高建 신드롬’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

  • 입력 2005년 7월 23일 03시 05분


코멘트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고건 전 국무총리 영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19일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지금 고려할 시기는 아니지만, 그분은 참여정부 총리를 지낸 만큼 영입 가능성은 우리 쪽이 더 높을 것”이라고 했다. 고 전 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낸 정당과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 울림이 사뭇 다르다. 대권 예비후보들이 즐비한 집권당의 대표가 처음으로 그를 영입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다. 이유가 뭘까. 여론조사의 힘이다.

고 전 총리는 지난해 5월 총리직을 그만둔 이래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후보 지지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지지율도 2위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전문 행정가로서의 경륜과 안정감에 대한 기대가 큰 탓도 있겠지만, 어떻든 1년 2개월째 같은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니 누구라도 ‘고건’이라는 요소를 빼고는 차기 대선구도를 얘기하기가 어렵게 돼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의장의 구애(求愛)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놓치고 있다. 여론조사는 원래 가변적이어서 과신(過信)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자는 게 아니다. 고 전 총리가 만약 차기 대선에서 성공한다면 우리는 건국 후 처음으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직업행정가 출신 대통령을 맞게 된다. 이 점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含意)는 무엇일까.

그동안 대권은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독립투사에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軍)을 거쳐,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가에게 넘겨져 왔다. 크게 보면 이는 그때그때의 시대적 소명(召命)과 세력 분포의 반영이기도 했다. 건국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과 근대화 과정에서 박정희의 역할은 좋은 예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기업(시장·市場) 대표 격으로 대권에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 전 총리는 누가 뭐래도 ‘행정권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국회의원 한 차례에, 민선 서울시장 두 차례, 그리고 대통령권한대행까지 했지만 그를 정치인(politician) 또는 정치가(statesman)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그의 대권 도전은 행정가에서 정치가로 변신하기 위한 실험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행정권력은 정치권력과 상하(上下)관계에 있다. 굳이 행정권력을 밑에 두는 것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서다. 정치권력이 다소 거칠고, 전문성과 효율성에서 뒤지지만 그것이 가공하지 않은 민의(民意)를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면 행정권력의 비대화, 관료화를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고 전 총리의 대권 도전이 이런 문제와는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 것일까.

행정가로서의 고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이다. 고려대 김영평(행정학) 교수는 한때 “고건은, 권위주의시대에 업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불도저형, 탱크형 기관장들과 달리 관행의 변화, 토론과 참여의 공개행정 등 소프트웨어 개선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전환시대의 행정가-한국형 지도자론, 이종범 편 1999년).

그러나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정치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제 형성 중이라지만 대체로 회의적이다.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정치인은 스스로 밥을 지어 여러 사람과 나눠 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고 총리는 밥상을 받을 줄밖에 모른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 전 총리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얘기하자는 게 아니다. 집권당의 대표가 영입을 입에 올릴 정도면 이런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안목과 판단이 있어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조금 뜬다 싶으니까 한 발 걸치고 가겠다는 식으로 비쳐서는 곤란하다. 하긴 상대를 안 가리고 연정(聯政)하자고 달려드는 정권이니 뭐는 못 하겠는가마는 정치를 너무 가볍게만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고 전 총리의 높은 지지율이 노무현 대통령의 분열적 리더십과 언행에 반사적으로 힘입은 바 커서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방해받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판이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