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KBS,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일부 보도

  • 입력 2005년 7월 22일 03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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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당시 중앙일간지 사장과 대기업 고위 인사가 대선자금과 관련해 나눈 대화 내용을 도청해 녹음했다는 테이프인 이른바 ‘X파일’을 MBC가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거론하면서 보도해서는 안 된다고 법원이 21일 결정했다.

▽법원의 보도 제한 결정=서울남부지법 민사수석부(수석부장판사 김만오·金滿五)는 이날 홍석현(洪錫炫·주미 대사) 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李鶴洙·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이 MBC를 상대로 낸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해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MBC는 기자의 목소리나 자료화면 자막을 통해 문제의 녹음테이프 원음을 그대로 방송하거나 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는 안 된다”며 “특히 테이프에 나타난 실명을 직접 거론하는 방법으로 방송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홍 전 사장과 이 전 삼성 실장은 이날 오전 “1997년 대선 직전 삼성 인사가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나눈 대화라며 불법 테이프를 매입한 것을 기초로 한 보도 내용 전체를 방송할 수 없게 해 달라”며 MBC를 상대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MBC KBS 보도 내용=MBC는 이날 뉴스데스크에서 “모 재벌기업 고위 간부와 한 중앙일간지 전 사장이 1997년 대선 때 정치권과 검은돈 거래를 하는 내용의 대화를 담은 녹음테이프를 1월에 입수했다”며 “두 차례에 걸친 성문 분석 결과 두 사람의 신분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MBC는 테이프를 입수한 뒤 보도를 유보한 경위와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청 테이프 조사 방침 등을 전했으나 테이프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실명은 거론하지 않았다.

MBC는 이어 “당시 여야 정치권 로비를 위해 수백만∼수천만 원의 떡값을 건넬 리스트를 논의했으며, 전현직 검찰 간부도 이에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KBS는 ‘뉴스9’에서 “1997년 국내 최고의 재벌기업 임원과 한 신문사의 최고 간부가 한 음식점에서 비밀리에 만남을 가졌다”면서 “이들의 대화 주제는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대선 판세와 대선 후보들에 대한 자금지원 문제였다”고 보도했다.

KBS는 “이들은 대선 후보들을 한 사람씩 꼽아 가며 지원할 돈의 규모와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상의했다”면서 “모 후보에게는 30개, 또 다른 후보는 10개, 각각 수십억 원 단위로 추정되는 재벌의 불법 대선자금 액수가 정해졌다”고 보도했다.

▽국가정보원 진상 조사=국정원은 이날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특수도청팀을 운영해 정재계 및 언론계 인사들이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불법 도청했다는 의혹에 대한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국정원은 이날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 뒤 “잘못된 과거를 씻어 버린다는 자세로 불법 도청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국민에게 밝힐 것”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어 “조사 결과에 따라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KBS 대화내용 상세보도…MBC는 법원 결정 수용

‘MBC는 미온, KBS는 적극.’

21일 ‘안기부 X파일’에 대한 보도에서 MBC와 KBS 메인뉴스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월 테이프를 입수한 MBC는 테이프 원음과 대화 내용을 사용할 수 없다는 법원의 결정을 염두에 둔 듯 이미 다른 언론에 보도된 내용과 비슷하게 방송했다. 하지만 KBS는 자신들이 입수했다는 녹취록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KBS는 이 같은 보도가 법적 논란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이날 오후 11시 방영된 ‘KBS 뉴스라인’에선 녹취록 보도는 빼고 안기부의 불법 도청 문제만 보도했으며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보도 동영상을 띄우지 않았다.

▽MBC가 보도한 ‘테이프 내용 개요’=1997년 9월 9일 서울시내의 한 호텔 일식집에서 중앙일간지 사주와 대기업 고위인사가 비밀스러운 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은 당시의 대선 판세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특히 여당 후보 진영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 내용이 많았다. 모두 수십억 원 규모다. 정치자금을 전하는 창구를 일원화하자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 테이프에 거론된 기업의 불법대선자금 제공은 1998년 검찰이 밝힌 이른바 세풍사건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내용이다.

일간지 사주는 여당 측뿐 아니라 야당 후보도 만난 내용을 보고했다. 여야 후보 진영 양측을 오가며 로비를 펼쳤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KBS 뉴스9 보도 내용=KBS는 이날 ‘뉴스 9’에서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대기업 고위임원과 중앙일간지 고위간부의 대화 내용 녹취록을 일일이 인용해 보도했다. 다음은 보도요지.

두 사람은 대선 후보들에 대한 자금전달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유력한 모 후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을 통하지 말고 중앙일간지 고위인사가 직접 전하라는 말도 오갔다.

모 후보의 동생에게 대선자금을 건네는 장소는 백화점 지하주차장으로 정했다. 중앙일간지 고위인사는 보안을 강조하고 모 후보는 보안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일간지 고위인사는 A자동차를 해당 기업이 인수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한 뒤 정치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을 기업 고위인사에게 제시했다.

일간지 고위간부는 경쟁 언론사 동향도 전했다. (경쟁사는) 특정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강문제를 치고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을 밝혔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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