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美서 입수 비밀 녹음테이프에 정재계-언론계 촉각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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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가 취재한 ‘X파일’의 뚜껑은 끝내 열리지 않을 것인가. 6월 8일 미디어오늘의 보도로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이른바 ‘MBC 이상호 기자의 X파일’ 보도 여부에 언론계는 물론 정재계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문제의 ‘X파일’은 이상호 기자가 1월 폐지된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 취재팀에 소속돼 있던 지난해 12월과 올 1월 미국에서 입수한 내용.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재계와 언론계 유력 인사 두 사람이 만나 로비를 위한 정치자금 배분을 상의하는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가 핵심 자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X파일, 출처는?=이상호 기자는 입수 경위에 대해 “제보자의 신원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MBC의 다른 관계자는 “당시 국내 정보기관이 불법 도청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는 이 테이프를 입수하기 위해 네 차례나 미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X파일, 무엇이 담겨있나?=테이프를 듣고 녹취록을 본 MBC 인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문제의 테이프에는 1997년 대선 직전 국내 굴지의 모 대기업 고위 간부와 모 종합일간지 사장이 서울시내 한 호텔의 유명 일식집에서 만나 대선 후보들에 대한 의견, 로비를 위한 정치 자금의 배분 문제 등에 대해 나눈 대화가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당시 유력 대선후보 한 사람에게 십수억 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하고, 다른 유력후보에게는 이보다 많은 자금을 제공하는 문제를 협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MBC의 한 인사는 또 “이 대기업이 당시 검찰의 전현직 고위 간부에게 관리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건넸다는 진술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MBC는 테이프가 조작된 것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성문 분석을 의뢰해 테이프에 등장하는 음성과 해당 인물이 일치한다는 것까지 확인한 상태다.

▽MBC, 보도 불가 방침=MBC는 테이프의 내용이 갖는 폭발성을 인정하면서도 테이프 제작의 불법성 때문에 ‘현재로선 보도 불가’ 결정을 내린 상태다. 테이프 내용과 관계없이 자료가 제작된 정황이나 MBC의 자료 입수 과정이 불법적이라 문제가 된다는 것. 테이프가 본인들의 동의 없이 비밀리에 녹음된 것인 데다 누가 녹음했는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MBC의 한 관계자는 “자문변호사, 현직 판검사들에게 문의한 결과 테이프를 공개할 경우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저촉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특히 테이프의 제작과정과 취득 경위가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보도했을 경우엔 가중 처벌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도청에 참여한 사람의 직접 증언 등 법적 문제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방송을 내보내기 힘들 것”이라며 “외부적으론 보도 유보로 돼 있지만 극적인 상황 변화가 없는 한 ‘보도 불가’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는 “추가 취재도 거의 마쳤지만 보도 여부에 대해선 내가 말할 입장이 아니다”며 “테이프에 등장하는 당사자에게 반론을 요구했으나 아직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MBC 내부 논란=MBC 기자들은 ‘X파일’의 존재가 공론화된 6월 초만 해도 민주방송실천위원회를 중심으로 보도를 강력히 주장했지만 최근에는 말을 아끼며 회사의 태도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기자들은 이달 초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총회를 열려다 유보한 상태.

노조의 한 간부는 “대선 당시 정치권과 재계, 언론계의 유착을 밝혀주는 자료로 보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보지만 취재가 진행 중인 상태여서 외부에 입장을 밝히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MBC가 보도 불가 결정을 내린 이유가 법적인 문제 때문만일까. MBC의 한 관계자는 “테이프에 나오는 인물 중 한 사람이 현 정부에 참여한 점이나 현재 TV 광고 시장이 매우 악화된 상태에서 유력한 광고주인 문제의 재벌기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X파일, 묻히나?=MBC 일각에선 “차라리 테이프를 검찰에 넘겨 수사의뢰하거나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에서 진상을 밝히도록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테이프의 주요 내용이 사실상 공개된 상태에서 다른 언론사들도 자체 취재를 통해 관련 보도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테이프가 공개된다고 해도 발언 당사자에 대한 처벌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치자금법 시효(3년)는 이미 지났고 시효가 남은 뇌물죄(10년)에 해당된다고 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법조인들의 해석이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특정 재벌의 정치권 유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도될 경우 이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 등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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