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지문]한국인 유엔총장에 대한 상상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06분


코멘트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그 함마슐드’라고 아나운서들이 발음했던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뉴스에 나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전 세계를 관리하는 기구인 유엔의 사무총장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경외심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수에즈운하 분쟁 등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국제적 문제들을 유능하고도 성심껏 해결하던 그가 분쟁 조정을 위해 콩고로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추락사한 이후 ‘Dag Hammarskj¨old’라는 독특한 철자와 그가 T S 엘리엇의 시를 애송하는 독신자였다는 등의 사실이 보도됐을 때 더욱 신비감을 느꼈다. 사망 후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추증됐을 때에는 마치 그가 성자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다음은 미얀마(당시 버마)의 우 탄트 사무총장이었는데, 아시아지역 출신 인사가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기뻤다. 그러나 중립국만이 유엔 사무총장을 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이제 유엔 사무총장 직이 우리나라에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감격스럽다. 우리가 유엔 사무총장을 낼 수 있다면 월드컵 4강 진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국가적 경사이고 모든 나라에 앞으로 4년간 한국인의 영향력과 역량을 체감하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홍석현 주미대사가 너무 일찍 출마를 선언했다니까 걱정이 된다. 홍 대사의 당선 가능성과, 당선이 됐을 경우 임무수행 능력이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국제외교가의 인물 평가는 매우 냉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홍 대사는 국제무대에서의 경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이끌어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검증 과정에서 그의 재산 형성 과정 등이 파헤쳐진다면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 체면도 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가 운이 좋아서 선출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국제적 분쟁의 유능한 조정자가 될 수 있을까? 국제 분쟁을 조정하려면 국지적(局地的)인 분쟁이라도 세계 각 지역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를 손금 보듯이 환히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분쟁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충분한 지식 위에 분쟁의 원인을 소상히 파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 문화권 사람들의 민족성과 의식도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사건이 터진 후의 족집게 과외로는 협상 테이블에서 미묘한 암시를 포착하고 즉각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충분한 토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각 당사국 또는 지역의 입장과 요구에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판단하고, 신뢰를 쌓은 위에 그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면서 진지하고 끈기 있게 설득해야 하리라고 생각되는데 홍 대사는 평생 남에게 지시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잘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걱정이 된다.

객관적 조건이 미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홍 대사가 일찌감치 출사표를 낸 이유(또는 속셈)가 몹시 궁금하다. 현 정부와 모종의 양해가 있었기 때문일까? 또는 다른 사람이 후보로 거론되고 지지를 얻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전략일까?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 당선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본부가 모쪼록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사들의 언어구사 능력,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 국제무대 경험, 외교업무 성적표, 국제사회의 인지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국가들의 그에 대한 평가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최적격 후보를 추대할 수 있기 바란다.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안보리 이사국들을 설득할 때 더 큰 영향력이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 과정에 개입하지 말고, 여기서 후보가 추대되면 그의 당선을 위해 최대한 후원해야 할 것이다.

현명한 후보 선정과 정부와 국민의 단결된 후원으로 우리 외교가 국제사회에서 한층 높은 위상을 갖게 되기 바란다. 그래서 한국인 유엔 사무총장의 역량 덕분에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또는 압제와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며 감사하는 여러 피부색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되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서지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교수·영문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