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나눕니다]<1>인사동 문예아카데미 10년 출강 고려대 양운덕 교수

  • 입력 2005년 7월 20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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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아카데미’에서 철학, 정신분석학, 문학을 넘나드는 명강연으로 열혈 팬까지 거느린 양운덕 고려대 연구교수. 김미옥 기자
‘문예아카데미’에서 철학, 정신분석학, 문학을 넘나드는 명강연으로 열혈 팬까지 거느린 양운덕 고려대 연구교수. 김미옥 기자
14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하나로빌딩 9층 문예아카데미 강의실.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날씨에 에어컨까지 고장 났지만 30명 정원의 강의실을 꽉 채운 수강생들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20대 초반의 여학생부터 50대 후반의 신사까지, 수강생들은 한 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진지한 눈빛으로 강사인 ‘언더그라운드 철학계의 스타’ 양운덕(45)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의 움직임을 쫓는다. 서양철학의 다양한 개념을 대중적 용어로 설파한 ‘피노키오의 철학’의 저자로도 유명한 양 교수는 1992년 제도권 교육 밖의 문화예술 강좌로 출범한 문예아카데미에서 10년 가까이 철학 강연을 하고 있다.

양 교수는 고려대에서 헤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문예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니체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프로이드 라캉 지젝 등 정신분석학자들, 세르반테스 카프카 보르헤스 등 작가들까지 소개해 서구 지성의 탁월한 안내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의 강좌를 거쳐 간 사람들 중에는 김영란 대법관,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등 유명 인사들도 한둘이 아니다.

이날 강연은 6월 30일부터 시작된 ‘들뢰즈의 철학 훈련-니체, 베르그송, 스피노자와 함께’(7주 과정)의 세 번째 시간. 그는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한다. 그것도 엄청 빠른 속도로. 웬만해서 받아 적을 수가 없을 정도다. 수강생들은 노트 하나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그의 설명을 아예 녹음하면서 강연을 듣는다.

“선생님 강의는 처음엔 너무 빠르고 현란해 벅차게 느껴지지만 둘째 날부터는 귀에 쏙쏙 들어와요. 구체적 사례와 비유를 많이 들어주시고 다른 철학적 개념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명히 밝혀 주시거든요.”(우경희·38·한국외국어대 철학 석사과정)

“…니체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부정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했지요. ‘내 탓을 하는 것은 운명의 주체로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남 탓보다 더 나쁘다.’ 니체에게 인생은 단 한판의 주사위놀이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확률도 필연도 없습니다. 우연(운명)만 존재합니다….”

강연의 내용은 강연 형식과도 연결된다. 들뢰즈가 니체철학을 충실히 설명한 저서 ‘니체’와 들뢰즈의 해석이 더 많이 가미된 ‘니체와 철학’이란 책, 그렇게 두 권을 읽고 오는 것이 지난 강의에서 내준 과제였다. 강의 시작 30여 분 뒤 양 교수는 학생들에게 주사위를 던지라고 말했다.

“자, ‘니체’를 할까요, ‘니체와 철학’을 할까요. 여러분이 선택하세요.”

한참의 침묵. 수강생들은 선뜻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다. 결국 양 교수가 ‘니체와 철학’을 선택한다. 순간 고장 났던 에어컨이 ‘윙’ 하고 다시 돌아갔다.

“니체는 착한 노예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공동체를 ‘슬픈 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도 있지만 살아남는 자는 늘 강자가 아니라 약자입니다. 강자는 적응이나 통제를 거부하지만 약자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 에어컨을 ‘슬픈 에어컨’이라고 부릅시다.”

침묵을 지키던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강의는 오후 10시 40분에 끝났다. 저녁식사를 거른 직장인들과 열혈 팬을 위한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다. 철학과 대학원생이 많았지만 소설가 지망생, 학원 강사, 홍보실 직원, 부부도 있었다. 양 교수는 이렇게 맺어진 열혈 팬들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개인연구실 ‘필로소피아’에서 과학철학연구회(월), 문학고전강독모임(화), 독서강연회(토)를 운영한다.

“이분들과 저를 이어주는 것은 기쁨과 행복의 철학입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채워주고 채워가는 즐거움. 그런 것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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