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첩이라니…누명벗은 함주명씨, 짓밟힌 21년

  • 입력 2005년 7월 16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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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나 미리 준비해 온 원고마저 읽지 못하겠더라고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다’는 재판장의 선고를 들을 때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1954년 위장 귀순해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돼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 씨의 물고문 전기고문을 견디다 못해 허위자백한 뒤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함주명(咸柱明·74·사진) 씨가 20여 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20여 년 만의 진실=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이호원·李鎬元)는 15일 함 씨가 “이 씨 등의 고문으로 간첩활동을 했다고 허위자백을 했다”며 청구한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5일간 불법 구금돼 고문과 폭행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고, 검찰조사 때도 경찰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허위자백을 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함 씨의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함 씨가 연루된 간첩사건을 제보했던 검거간첩 홍모 씨의 진술도 시간이 흐를수록 엇갈리는 등 객관적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고문의 기억=북한 개성에서 살던 함 씨는 1954년 남한으로 내려간 가족을 찾기 위해 대남공작원(간첩)을 자원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는 남한으로 내려오자마자 자수하고 춘천지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 후 함 씨는 폐품 팔이, 테이프 복사, 사진점, 분식집 일 등을 해 가며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나 1983년 영문도 모른 채 간첩혐의로 체포돼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당시 치안본부는 “함 씨가 1954년 남파 즉시 위장 자수해 가벼운 처벌을 받고 석방된 뒤 30여 년간 북한의 지령을 받아 고정간첩으로 활동해 왔다”며 간첩 사건을 조작해 발표했다.

함 씨는 “이 씨가 온몸을 꼼짝 못하게 묶어 놓고 얼굴과 입에 수건을 대고 샤워꼭지를 틀었다”며 “숨 막히도록 물만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양쪽 새끼발가락에 전기를 연결하고는 묻는 말을 시인하면 손끝을 움직이라고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재심청구=서울중앙지검은 1999년 11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변호사 13명이 이 씨를 고발하자 다음 달 “이 씨가 함 씨를 45일 동안 불법 감금한 상태에서 고문수사를 자행해 상해를 입게 하고 함 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위증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함 씨는 재심을 청구했다.

선고 후 법원 기자실을 방문한 함 씨는 “막내아들이 간첩의 자식으로 몰려 결혼도 못했는데 이제는 맘 편히 장가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간첩조작사건 연루자들의 고통을 검찰과 법원이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이 같은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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