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가와 쇼준, 'KAL폭파 한국정보기관 자작극' 의혹 일축

  • 입력 2005년 7월 12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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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가 음독을 안 했다고요? 어처구니없군요."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기 폭파 테러사건 발생 당시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김현희를 가장 먼저 접촉했던 스나가와 쇼준(砂川昌順·45)씨. 그는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일고 있는 한국 정보기관의 자작극 의혹을 일축했다.

정부가 과거사 규명차원에서 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을 계기로 최근 그를 도쿄에서 만났다.

스나가와 씨는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 당시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 폭발 직전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린 두 명의 일본 여권 소지자의 행방을 추적해 바레인의 한 호텔에 투숙중인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와 김승일(하치야 신이치)을 찾아냈다. 잠복 끝에 이들이 타국으로 탈출하려는 순간 공항 출입국담당자를 설득해 이들을 붙잡아두는데 성공했고 음독 현장도 지켜본 그다.

"두 사람의 생사가 갈린 이유는 간단합니다. 김승일은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고 즉사했고 김현희는 감시원이 캡슐을 쳐내는 바람에 미량만 흡입한 탓이지요. 음독 직후 두 사람이 경련을 하는 모습은 절대 꾸며낼 수 없는 형상이었습니다."

한국 정보기관 개입설에 대해 그는 "거짓말을 많이 한 역대 독재정권을 한국민이 불신하는 것은 이해하나 당시 조사 경험으로 봐서 이 사건은 100% (자작극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바레인 호텔에 투숙한 두 사람과의 대화나 음독 상황을 기록한 녹음테이프 등 각종 자료를 보관중이다. 하지만 '진실이 완전 은폐될 우려가 없는 한' 공표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범인이 일본인으로 밝혀질 경우 양국 단교까지 갈 엄청난 사건인지라 당시 그는 항상 녹음기를 켜놓고 행동했었다.

김현희 등이 수백 점의 증거물을 남기는 등 '프로' 공작원답지 않다는 일부의 의혹제기에 대해서도 그는 이렇게 반박했다.

"당시 두 사람의 짐은 김현희의 숄더백 한 개밖에 없었어요. 가방 속 36매 필름 한 통도 증거물 수로는 36점이니 수백 점이라 해도 실은 별 게 아니지요. 오히려 짐이 너무 없다는 게 이상했지요. 관광객 행세를 하려면 큰 짐가방이 더 어울렸겠지요."

그는 김현희의 수기에서 범행 직전 묵었던 것으로 등장하는 오스트리아의 한 호텔 객실 번호가 실제와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한 부분이 틀렸다고 전체를 다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일본정부 측 조사담당자로서 한국 압송시까지 김현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말씨가 적지만 얌전하고 자연스런 일본어였습니다. 미묘한 외국인풍 발음은 있었지만."

스나가와씨는 "음독 직후 병실에서 김현희가 '일본인이 아닌데도 친절하게 대해 줘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테러범은 일본인이 아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회고했다.

현재 평범한 주부로 지내고 있는 김현희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을까.

"아내로서 엄마로서 행복하게 살아간다니 반갑고 축복할 일이지요. 하지만 살아가는 방법은 틀렸어요. 법적 용서를 받고, 종교에 귀의해 신의 용서도 받았는지 모르나 한국민의 감정으로 볼 때 죄는 아직 씻기지 않았습니다. 신변위협이 있겠지만 남북통일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것이 죄값을 치르는 길입니다."

사건 이후 17년여가 흐른 지금 북한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까.

"북한은 그 뒤 큰 테러사건은 저지르지 않았지요. 남북화해 정책이 효과를 거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 왕조 체제는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 없어요. 김정일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면 과거 국가범죄를 모두 고백, 사죄하고 자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는 당시 한국 수사진에 대해 가졌던 실망감도 털어놓았다.

"한국 측 발표에서 '긴밀한 한일 수사공조' 운운했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김대중 납치사건'의 영향으로 당시 공조체제는 단절 상태였습니다. 또 용의자 발견에서 체포 음독 귀국 때까지 계속 조사한 제게 어느 한국 측 관계자도 한마디 물어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도. 대체 어떻게들 수사를 했는지…."

대통령 선거 전날 김현희 압송극을 연출해 여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일 때문에 한국 정보기관이 테러 정보를 얻고도 정치적 속셈으로 방치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고 하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그런 가능성조차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증거는 없지만요."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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