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최악의 학살사건이었다. 당시 스레브레니차에는 6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있었다. 그러나 수적으로나 무기에서 열세였던 평화유지군은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교외의 한 공장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를 격리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을 추도하는 10주기 행사가 11일 현지에서 열렸다.
추도식에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 세르비아 대통령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이슬람교도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고 가해자인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강경파도 세르비아 대통령의 추도식 참석에 반대했다. 갈등의 골은 아직도 깊었다.
스레브레니차 대학살의 시발점이 된 보스니아 내전. 1991년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시도한 보스니아계 및 크로아티아계가 이에 반대하는 세르비아계와 벌인 싸움으로 모두 26만 명이 숨지고 2만 명이 실종됐다. 지금도 80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신도 수천 구나 찾지 못하고 있다.
송평인 기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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