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입시제도 전쟁’의 진실

  • 입력 2005년 7월 8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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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5등급제로 하자.’ 지난해 2008학년도 새 입시제도를 만들 때 전교조와 일부 단체는 이렇게 주장했다. 한 해 60만 명이 치르는 수능에서 1등급을 상위 20%로 잡으면 12만 명이 1등급을 받게 된다. 전국 1등과 12만등이 입시에서 똑같은 점수로 취급되는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수능을 등급제로 하자는 단체들의 주장을 수용하되 9등급제로 세분하는 절충안을 채택했다. 최상위권인 1등급 비율은 당정협의까지 거친 끝에 상위 4%로 낙착됐다. 1등급을 7%까지 확대해 최대한 많이 내자는 열린우리당의 압박을 교육부가 간신히 막아낸 결과였다.

정권과 서울대의 전면대결을 촉발한 새 입시제도는 교육당국이 혼자 만든 게 아니었다. 사립학교법 개정 등 여당의 ‘개혁’과제 추진을 위해 국회 교육위원회에 급파됐다는 열린우리당의 386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교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1 학생들이 스스로 ‘저주 받은 89년생’이라고 외치며 새 입시제도에 반대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대학들이 ‘뭘 보고 학생을 뽑으란 말이냐’고 하소연하는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동네북’이 돼 버린 교육부 이전에 여당과 운동단체에 책임이 있다. 새 입시제도를 만들 때 누가 ‘약자’였고 누가 ‘강자’였는지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서울대 때리기’는 순식간에 서울대를 ‘공공의 적’으로 몰고 있는 험악한 분위기다. 서울대가 본고사를 부활시켜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우선 검증돼야 할 것은 서울대의 논술시험이 본고사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서울대가 지난달 발표한 입시안을 보자. ‘논술고사에서는 고교 교육과정에 기초한 통합교과 형태(인문계열은 역사와 사회, 언어와 문학, 철학과 예술, 자연계열은 인문과 사회과학, 수리)의 문제가 다양한 유형으로 출제될 예정이며 독서를 통한 창의적인 사고력과 분석능력을 측정한다’고 돼 있다. 서울대는 실제 문제 유형을 10월에 발표한다고 예고했다.

대입 본고사에 대해서는 고등교육법 시행령 35조에 ‘논술 이외에 필답고사를 치르는 대학’에 교육 당국이 시정을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본고사는 국어 영어 수학 등 필답고사를 의미한다는 게 교육부의 해석이다. 현 단계에서 서울대 논술을 본고사로 보는 것은 성급하다. 노 대통령이 어제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 ‘본고사를 부활해야 하느냐’며 본고사로 단정한 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놓고 속단한 데 불과하다.

본고사 등을 금지한 ‘3불(不)정책’도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노 대통령은 본고사를 치르면 과외열풍이 살아난다고 우려했지만 본고사를 엄격히 금지해 왔는데도 사교육이 날로 번창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울대가 도입하겠다는 ‘통합교과형 논술’은 선진국의 교육방향과도 일치한다. 미국이 대입학력시험인 SAT에 논술을 도입했고 올해 프랑스의 수능인 바칼로레아의 논술문제는 ‘언어는 오직 의사소통을 위한 것인가’였다. 이런 것이 바로 통합교과 논술이다. 논술에서 중시하는 창의력과 사고력은 정부가 황우석 박사 등 ‘필수적 인적자원’을 거론할 때마다 단골로 강조해 온 것이 아니던가.

국정홍보처장은 “서울대를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력의 살기가 느껴지는 말이다. 서울대에 대한 공격에는 정권의 ‘코드집단’이 총동원되고 있다. 교육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며 말썽 많은 새 입시제도에 관여했던 집단들이다. 여러모로 민심이 흉흉한 시점에서 교육정책 실패의 책임을 서울대에 떠넘기려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정권은 서울대에 돌을 던지기 전에 그럴 자격이 있는지 먼저 돌아보라.

홍찬식논설위원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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