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인천 서구 당하동의 갈륨비소반도체 전문 업체인 ‘네오세미테크’ 공장에서 만난 한국수출입은행 홍경석(洪炅錫·56) 부장. 그가 내미는 명함에는 은행 부장 직함 대신 ‘네오세미테크 상임 고문’이라고 찍혀 있었다.
홍 부장은 올해 1월 수출입은행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뒤 이 제도의 첫 번째 적용 대상자. 2008년 8월 퇴직할 때까지 이 은행의 거래업체인 네오세미테크로 출근해 장기 컨설팅을 하면서 월급은 은행 쪽에서 받는다.
올해 그의 연봉은 임금피크제 적용 직전인 지난해의 90%로 줄었고 내년에는 75%, 다시 이듬해에는 60%로 감소했다가 퇴직하는 해인 2008년에는 30%로 낮아진다.
홍 부장은 “봉급은 줄었지만 오랜 경험을 성장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의 미래에 투자하게 됐고 퇴직 후를 대비할 기회도 얻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수출입은행처럼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대우조선해양 한국수자원공사 한국감정원 등이 시행에 들어간 데 이어 올해에는 수출입은행 우리은행 한국산업은행 문화방송 등도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현대자동차 조일제지 등 일부 제조업체와 한국지역난방공사, 농업기반공사도 직원의 연령 증가로 늘어난 인건비 부담을 덜기 위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미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 중에는 절감된 인건비로 신입사원을 더 뽑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어 고령자 문제 및 청년실업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2003년 제조업체 가운데 처음으로 이 제도를 받아들인 대한전선은 회사의 위기를 느낀 노조가 먼저 회사 측에 도입을 제안했다. 지금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들이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이 제도 도입을 기업들에 권고하고 있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고(高)임금-저(低)성장-고령화 시대’에 기업의 부담과 근로자의 조기 퇴직을 동시에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임금피크제를 꼽는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金廷翰) 연구위원은 “50대 초중반에 은퇴해 노후생활이 불안해지는 것보다는 월급이 깎이더라도 정년, 또는 그 이후까지 일하길 원하는 근로자가 많아지고 있어 임금피크제는 더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근로자의 임금삭감을 불러온다며 반발하고 있어 노사관계의 새로운 마찰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임금피크제:
일정한 나이를 정점으로 퇴직할 때까지 근로자의 임금을 단계적으로 삭감하는 제도. 대신 회사는 정년을 보장하거나 때로 늘려주기도 한다. 근로자는 고용이 안정되고 회사는 임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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