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능-이익단체 이념분화]少數단체 출신 ‘권력’속으로

  • 입력 2005년 7월 1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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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이념에 반발한 일부 예비역 군인들이 ‘평화 재향군인회’ 결성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는 한국 사회의 ‘오늘’을 읽는 데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대표적 보수단체인 향군 내부에서 진보를 표방하는 소수파가 독립을 선언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이념에 따른 분화 현상이 정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직능 및 이익단체에서 진보적 성향의 소수파들이 모태를 깨고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이념적 분할은 김대중(金大中) 정권을 거쳐 현 정권 출범 후 가속이 붙어 왔다. 특히 예전엔 ‘또 하나의 목소리’에 그쳤던 소수파들이 현 정권의 주류세력 교체작업에 힘입어 각 부문에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해 새로운 주류로 포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념 분화 및 권력 이동에 숨겨진 정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2007년 대선을 비롯한 각종 선거와 우리 사회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짚어 본다.》

직능 및 이익단체들의 이념 분화가 가시화된 것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억눌렸던 소수 진보 세력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해 사회 각 부문의 이념 분화 현상은 질적으로 ‘혁명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다수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파들이 각 부문에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류 세력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정치, 사회, 이념적으로 큰 변화를 몰아 오고 있는 것이다.

▽가속화되는 이념 분화=이념 분화는 대개 보수적 세력(집단)에서 진보적인 세력(집단)이 분리 독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8년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1970, 80년대 인권에 관심을 가졌던 변호사들이 대한변호사협회의 보수적인 인권운동을 비판하면서 민변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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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운동권 출신의 작가 미술가 등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보수성을 비판하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결성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역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를 비판하는 진보적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1989년 5월 태동, 1999년 1월 합법화됐다.

1995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탈퇴하고 결성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말 현재 약 61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려 한국노총(약 95만 명)과 대등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

1990년대 후반기부터는 문화 예술 학술단체 등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이념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8년 한국언론학회의 보수성에 반기를 들고 출범한 한국언론정보학회,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의 보수적 이념에 반대해 문성근 명계남 씨 등 소장파 영화인들이 결성한 영화인회의가 대표적이다.

▽마이너리티들의 권력 장악=기존 세력에 반기를 들고 새롭게 등장한 소수파들은 현 정권 들어 각 부문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민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박주현(朴珠賢) 전 대통령참여수석, 전해철(全海澈) 민정비서관, 김준곤(金焌坤) 법무비서관, 박범계(朴範界) 전 민정2비서관, 고영구(高泳耉) 국가정보원장, 강금실(康錦實) 전 법무부 장관, 김창국(金昌國) 전 국가인권위원장, 천정배(千正培) 신임 법무부 장관 등 민변 출신 주요 인사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민변의 현재 회원은 451명으로 전체 변호사(6900여 명)의 6, 7%에 불과하지만 핵심적인 권력을 두루 장악하고 있는 셈.

문화예술계의 주류 자리를 차지한 민예총에 대한 정부 지원금 변화는 권력이동의 결과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본보가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 민예총사업에 지원된 문예진흥기금은 총 62건에 6억3900만 원으로 2002년 한 해 동안의 지원금 총액 3억700만 원(21건)의 두 배에 달한다. 민예총이 ‘소외받는 소수’였던 김영삼(金泳三) 정권 때인 1997년에 받은 지원금은 9750만 원에 불과했다.

▽이념 분화의 과도한 정치성=전문가 및 이익집단이 이념에 따라 분화하고 집권세력이 자신의 이념에 맞는 인물을 활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소수 세력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이처럼 급속히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등장해 정권의 우군을 형성한 데 대해선 찬반양론이 있다.

이념에 따른 분화 차원을 넘어서서, 코드가 맞는 세력들이 사회 각 부문에서 정권과 정책 동조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 같은 현상이 정권 측의 정교한 전략에 따른 작업의 결과물이든, 아니면 통치자가 몰고 가는 큰 물결에 수반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든 작금의 이념 분화는 차기 대선을 비롯한 정치 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전상인(全相仁·사회학) 한림대 교수는 “현재 직능 단체의 이념 분화는 구성원들의 집합적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이념적 성향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며 “최근의 분열 현상은 내부의 자발적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모종의 정치적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정치 과잉,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전 교수는 “이념 과잉으로 인한 분열은 전체 단체의 이익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결국 통합 요구가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보수-진보단체간 과도기적 힘겨루기▼

학자들은 직능단체의 이념적 분화를 과도기적 현상으로 바라보면서도 과잉 정치화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학자들은 직능단체의 분화를 사회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확산되는 이념적 분화의 반영으로 보면서도 각 부문의 주류세력 교체를 통해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려는 정권 측의 의도가 투영된 결과라면 시민사회의 정치종속화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호기(金晧起·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과거 진보적 진영이 우세했던 시민단체 영역에서 보수 성향의 단체가 늘고 과거 보수적 영역이 우세했던 직능단체 영역에서는 진보 성향의 단체가 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일영(金一榮·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도 “‘향군’에 대항해 ‘평군’이 생겨나는 것이 보수의 아성이었던 안보 영역에 대한 진보의 도전이라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맞서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시변)’이 생겨난 것은 진보 진영의 권력 장악에 대한 보수적 반작용”이라고 해석했다.

조대엽(趙大燁·사회학) 고려대 교수는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직능단체가 친정부 성향과 반정부 성향으로 나뉘었다면 탈권위주의 시대가 되면서 직능단체의 내부 이익의 다기화로 분화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김호기 교수는 “직능단체의 다원화는 기존 직능단체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반발로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이념의 과잉은 결국 시민사회를 정치사회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평군’ 임시대표 표명렬씨▼

최근 출범을 공식 선언한 평화 재향군인회(평군)는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1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했다. 현재 회원이 수백 명 규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군 임시 상임대표인 표명렬(表明列·66·사진) 씨는 육사 18기로 전두환 군사정권 말기에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예비역 준장. 표 씨는 전역 후 6공화국 때 여당인 민정당에 입당해 고향인 전남 완도에서 두 차례 국회의원에 도전했지만 공천 탈락 등으로 실패했다. 이후 김대중 정권 때 민주당에 들어가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 3년 전부터는 이라크 파병 반대, 주적론 교육 중단, 국군의 날 변경 등을 요구하며 군 정책과 정통성을 강력히 비판해 왔다. 이 때문에 표 씨는 2003년 12월 예비역 정훈장교 모임에서 제명됐고 현재 군사평론가와 민족문제연구소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일각에선 ‘군 과거사 및 친일잔재 청산’ 등 평군의 주장들이 참여정부의 개혁코드와 일치하는 점에 주목해 평군이 개혁 진보성향 정치세력이나 시민단체와 연계돼 정치세력화를 노리는 게 아니냐는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표 씨는 “그런 의혹은 터무니없으며 정치권과 관련이 없는 젊은이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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