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質보다 量’ 17대국회 1년

  • 입력 2005년 5월 30일 03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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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국회의원 1인당 입법 발의 건수를 제한하는 국회법 개정안이라도 내야 할까 봐요. (법안이) 이렇게 끝도 없이 밀려들어서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의 한 의원은 “제출된 법안들을 심사하다 보면 가슴부터 답답해진다”며 이같이 푸념했다.

법치국가에서 독립기관인 국회의원의 자유로운 입법 활동을 막는다는 것이 황당무계한 발상이라는 걸 법률전문가인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의 푸념은 법안 처리에 허덕이는 국회의 현 상황을 잘 보여 준다.

국회 관계자들은 17대 국회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의원들이 낸 법안의 급증을 든다. 시민단체나 언론이 법안 발의 건수를 의정활동 평가 기준의 하나로 삼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또 비슷한 내용의 법안들이 비슷한 시기에 쏟아지는 현상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의원회관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안 베끼기 경쟁 때문이다. 한 의원보좌관은 “옆방에서 우리 법안을 베끼지 못하도록 보안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사건이 터진 뒤 ‘전파를 차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모두 8건이 제출됐다. 또 학교급식 파동 때는 학교급식법 개정안이 6건, 경남 밀양 성폭력사건 때는 성폭력특별법 개정안이 3건 나왔다. 문제는 그 내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국회 출석률도 중요해졌다. 의원들의 누적 출석시간을 체크하자는 논의도 나왔다. 한 재선의원은 “아예 의원석에 센서를 달아서 계산하면 어떻겠느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평가의 부작용을 막으려면 전문가가 참여하는 정성(定性) 평가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회의에서 얼마나 깊이 논의하는지, 법안 내용은 얼마나 튼실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17대 국회 출범 1주년을 계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원들 스스로 “숫자로 대충 때우지 않고 충실하게 의정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이정은 정치부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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