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냉소적 이성비판1’…냉소에 무기력한 현대철학

  • 입력 2005년 5월 28일 07시 44분


코멘트
자유를 위해 무소유를 실천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세계를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묻자 “대왕이 지금 일광욕을 방해하고 있으니 좀 비켜 달라”고 답한 장면을 담은 그림. 슬로터다이크는 이 일화야말로 실천으로서 철학,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철학을 보여 준다고 극찬한다. 사진 제공 에코리브르
자유를 위해 무소유를 실천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세계를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소원을 묻자 “대왕이 지금 일광욕을 방해하고 있으니 좀 비켜 달라”고 답한 장면을 담은 그림. 슬로터다이크는 이 일화야말로 실천으로서 철학, 권력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철학을 보여 준다고 극찬한다. 사진 제공 에코리브르
◇냉소적 이성비판1/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이진우 박미애 옮김/390쪽·2만3000원·에코리브르

“현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다.”

이 말은 D H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첫 구절이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금서가 됐던 이 소설의 위대함은 이처럼 현대성의 본질을 꿰뚫어 봤기 때문이다. 로런스는 현대성의 위기가 육체와 유리된 창백한 이성, 자연과 절연된 메마른 윤리에서 빚어진다고 봤다. 육체와 성애에 대한 뻔뻔하고 몰염치한 묘사는 바로 그런 현대성의 비생명성을 폭로하고 저항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착취성도 알고 사회주의의 허구성도 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과 이슬람 근본주의의 위험성도 안다. 우리를 꾸준히 학습시킨 계몽의 성과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눈을 부릅뜨고 되물으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우리는 역사와 윤리에 정통하지만 ‘왕따’에 침묵하고, 학교폭력에 눈을 감는 ‘범생이’일 뿐이다. 계몽의 좌절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합리성에 기초한 비판철학을 펼친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정조준한다. 그들의 비판은 계몽의 특징인 분별과 신중을 앞세우기 때문에 섬세하지만 병약하고, 반항적이지만 야성적이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 비판이 아무리 설득력 있다 해도 실제로 비판의 대상을 ‘처치’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비판의 대상에게 학습효과를 불어넣어줘 면역력을 키워 준다. 계몽의 역설이다.

계몽의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탄생한 현대적 냉소주의는 비겁하다. 현대적 냉소주의는 익명성을 특징으로 한다. 심술궂은 눈초리로 군중 속에 잠적한 채 분열증적인 불평불만만 늘어놓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여기서 냉소주의와 같은 어원을 지녔던 고대 그리스 견유주의(犬儒主義)의 부활을 주장한다. 디오게네스라는 불멸의 모델을 지닌 견유주의는 본디 적나라한 폭로와 독설적인 조롱, 뻔뻔한 풍자를 무기로 한다.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언어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시장에서 대놓고 배설 행위를 하고, 소원을 말해 보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질문에 ‘태양을 가리니 옆으로 좀 비켜 달라’고 응수하고,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걸으며 ‘사람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고담준론을 떠들어대는 현대 철학자들의 ‘냉소적 이성’을 겨냥해 “실천할 수 없다면 입 닥치고 있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에게 고단하게 훈육된 우리들에게는 통쾌한 선언이다. 그러나 난해한 철학 개념을 놓고 현란한 수사를 펼치는 이 책 자체가 디오게네스의 ‘낮은 철학’을 실천하지 못하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원제 ‘Kritik der zynischen Vernunft’(1983).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