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빨간 양철지붕 아래서’…자연서 ‘삶’을 찾았네

  • 입력 2005년 5월 28일 0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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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양철지붕 아래서/오병욱 지음/296쪽·1만2000원·뜨인돌

15년 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경북 상주) 시골집으로 내려간 화가 오병욱 씨가 ‘빨간 양철지붕 집’에서 부인,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신의 그림, 사진들과 함께 엮었다.

낙동강에서 가까운 폐교를 빌려 아침마다 부인이 싸 준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 종일 그림을 그리고 퇴근하는 작가는 한때 시인을 꿈꾸었던 전력답게 빼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명징한 언어들로 자연과 일상에서 발견한 설렘 반짝임 그리움들을 쏟아냈다.

‘뽀얀 간유리 밖으로 반짝이며 움직이는 게 뭔가 싶어서 창문을 막 열어젖힌 참이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눈 녹은 물이 돌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영롱한 구슬조각이 이리 튀고 저리 튀어 황홀한 봄날 아침이다. 고드름 조각이 철컥철컥 떨어진 주변이 벌써 푸릇푸릇하다. 눈 녹은 물은 참 맑기도 하지. 초봄에 이렇게 큰 눈이 오다니. 저 눈 녹은 물이 흘러가는 속도로 봄이 다시 다가오는 것이리라. 그래, 봄 눈 녹듯이, 그저 봄 눈 녹듯이 그렇게….’(‘폭설’ 중에서)

시시때때로 모습을 바꾸는 자연의 빛깔과 향기, 어느 날 찾아온 반가운 손님 딱새 이야기, 구수하고 정겨운 시골 이웃의 모습, 작업실인 폐교가 물에 잠기는 바람에 2년간의 작업들을 고스란히 떠내려 보내야 했던 일, 유년과 젊은 날의 기억이 세련된 언어들로 펼쳐진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와 대학원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작가와 큐레이터 일을 번갈아 하다 낙향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또 주변의 기대 속에서 이론가, 큐레이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무거워 일상을 한없이 겉돌다가 도망치듯이 상주로 내려갔다”고 고백한다.

한동안 일부러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고 그림도 안 그렸다. 돌담을 새로 쌓거나 웅덩이를 쳐 내고, 무너진 굴뚝을 세우고 집을 수리하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고, 냇가에서 조약돌을 줍고, 길에 핀 들꽃을 꺾고, 달이 좋은 밤 마당을 서성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반짝이는 자연 속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동안 분노에 싸였던, 행동하지 못했던, 진정으로 예술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과 비로소 화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대 미대 김병종 교수는 “일찍부터 도시를 떠나 자연의 언어와 빛깔, 냄새와 소리를 익힌 그는 도시인이 못 듣는 소리를 듣고 도시인이 놓쳐 버린 색채를 붙잡는다. 바로 그 소리와 색채와 빛깔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때로 고행의 배낭을 꾸리기도 하는데 오병욱은 아예 재가승처럼 산마을에 눌러 앉아 좀체 하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회색도시에 살면서 ‘키발’을 선 채로 창밖을 보며 바다와 산과 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고 추천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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