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9>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28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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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지금 우리가 괴로워하는 일은 성안의 양식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과 가까운 날에는 구원을 올 우군(友軍)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왕이나 범증도 그쯤은 헤아리고 있을 터이니, 우리는 먼저 그 헤아림이 틀렸다는 것부터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사흘 뒤 술을 넉넉히 거르고 마소를 여러 마리 잡아 성벽위에서 크게 잔치를 벌이도록 하십시오. 우리 장졸들이 종일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면 항왕은 아직도 성안의 곡식과 고기가 넉넉한 줄 알고 몹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다시 날을 잡아 한밤중에 성문을 열고 동 남 북 세 갈래로 군사를 내 급작스레 적을 들이치게 하십시오. 적병은 형양성을 에워싼 뒤로 처음 당하는 일이라 적잖이 허둥댈 것입니다. 그 틈을 타 길을 앗고 사자를 세 갈래로 배웅한 뒤 성안으로 돌아오면 적은 우리가 급히 원병을 부른 줄 알고 초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성을 빠져나간 우리 사자가 한신과 팽월, 경포에게 달려가 초군과 전단을 열기를 재촉하고, 성고와 오창에서도 약간의 유군(遊軍)을 움직이게 하면 항왕은 자신의 헤아림이 틀렸다고 보아 크게 마음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때 사자를 보내 형양 동쪽을 모두 내놓고 관중으로 물러날 터이니 이만 싸움을 거두자고 해보십시오. 조금 전에 말씀하신 대로 한신과 장이를 불러들여 위(魏) 조(趙) 연(燕)을 내놓고, 팽월과 경포를 단속해 양(梁)과 구강(九江)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시면 항왕도 대왕의 요청을 무턱대고 뿌리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방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길이 훤히 보이는 듯하구려. 그대로 따르리다.”

한왕이 한층 환한 얼굴로 그렇게 장량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왠지 진평은 여전히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았다.

한왕은 그날로 장량이 하자는 대로 했다. 곡식을 아끼지 말고 술을 빚게 하더니 술이 익기 바쁘게 걸러 독째 성벽 위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다시 보란 듯이 수십 마리 마소를 잡아 성벽 위에서 지지고 굽게 하며 장졸들과 흥청망청 잔치를 벌였다. 또 잔치를 벌인 그날 밤에는 동 남 북 세 성문으로 급작스레 군사를 내어 낮의 일로 어리둥절해 있는 초나라 군사들을 흩고 세 갈래 사자를 10리 밖으로 배웅하였다.

그렇게 되자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초나라 군사들의 기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쓸데없이 한군을 지치게 하는 양동(陽動)을 멈추었고, 진채도 성문에서 너무 가까운 것은 몇 마장 뒤로 빼서 또 다른 성안으로부터의 기습에 대비했다. 무엇 때문인지 항왕도 며칠은 진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때가 된 듯합니다. 항왕에게 사자를 보내 싸움을 거두자고 해보시지요.”

며칠 성벽 위에서 찬찬히 적진을 살피던 장량이 그렇게 한왕에게 권했다. 이에 한왕은 초나라 사람으로 말솜씨가 뛰어난 육고(陸賈)를 패왕에게 보내 휴전을 권해보게 했다.

육고가 패왕 항우를 찾아보고 말했다.

“우리 대왕께서 형양 서쪽의 땅을 모두 패왕께 바칠 터이니 이만 싸움을 거두자고 하십니다. 형양 동쪽에서 함곡관까지는 한나라와 초나라가 날카롭게 부딪치는 걸 막아주는 바깥울타리로 남겨둘 뿐, 한나라는 애초대로 관중(關中) 땅만으로 넉넉하다고 하십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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