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피카소와 장승업

  • 입력 2005년 5월 28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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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취화선’으로 널리 알려진 장승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손꼽히는 천재화가다. 그의 놀라운 그림 재능은 전설이 되어 남아 있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떠돌던 장승업은 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그 집은 그림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고 여러 사람이 모여 미술품을 감상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때마다 장승업은 어깨너머로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붓을 잡아본 적도 없는 장승업은 어느 날 손이 가는대로 그림을 그려 본다. 대나무 매화 난초 바위 같은 화제(畵題)들이 붓끝에서 쏟아져 나왔다. 집주인은 “신이 내린 솜씨”라며 경탄해 마지않는다.

20세기 최고의 천재화가는 파블로 피카소다. 말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걸 먼저 배웠고 16세 때 스페인의 공모전을 휩쓸었다. “내 나이 열두 살 때 라파엘로처럼 그렸다”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두 화가의 천재성을 저울질하는 것은 동서양의 미술을 비교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장승업과 20세기를 살았던 피카소는 각기 다른 시대를 장식한 천재들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날 장승업이 ‘불우한 예술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반면, 피카소는 세계 미술사를 새로 쓴 화가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피카소는 19세 때 프랑스 파리를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모국을 떠난다. 당시 세계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당당히 실력을 겨뤄보겠다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선 명성이 자자했던 피카소였지만 파리에선 달랐다. 첫 전시회는 실패로 끝나고 어느 화랑에 판매를 의뢰했던 그림 30점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소득은 있었다. 많은 경쟁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의 천재성을 꿰뚫어 본 후원자를 여럿 만났다. 특히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마티스를 뛰어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결국 30세가 되기 전에 피카소는 파리 미술계에서 최고의 그림 값을 받는 화가가 된다.

장승업은 아마도 조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겠다는 선견지명도, 그럴 기회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조선사회는 장승업의 재능이 활짝 꽃을 피울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는 중인(中人)계급의 후원을 받았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주류인 양반사회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얘기와 같다. 아무리 천재성이 넘쳤어도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고, 출생도 알 수 없는 고아 출신에 대한 대접이 따듯했을 리 없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서야 그림을 그렸다는 그의 기행(奇行)에서 소외감과 울분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똑같이 ‘신이 내린 재능’을 지녔어도 장승업의 주변에는 선의의 경쟁을 벌일 상대도, 격려해 주는 후원자도 많지 않았다. 장승업이 지금 남아 있는 그림만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그를 좀 더 알아주는 사회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은 여전히 재능을 축복하는 사회가 아니다. 실력이 눈으로 확인되는 스포츠의 세계 같은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남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풍토에선 공정한 경쟁이 어렵고 재능을 승화시키는 효과적인 시스템도 기대할 수 없다.

대학에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지 말라’고 요구하거나, 시험점수는 사교육을 통해 돈 주고 산 것이니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회에서 재능은 이내 주눅 들고 만다. 30년간 지속된 평준화 체제의 치명적인 결함은 재능 있는 학생을 소외시킨 것이다.

그 결과 빈곤계층은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에서 갈수록 배제되고 있다. 오늘날 불우한 천재들의 얼굴 위에 장승업이 느꼈을 ‘시대의 우울’이 어른거린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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