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대근]장문병(長文病)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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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판결문의 특색 중 하나는 문장이 길다는 것이다. ‘원고 소송대리인은 …이라는 판결을 요청하였고, 그 청구의 원인으로써 …이라고 진술하고, 피고의 답변에 대해서 …이라고 이야기하여, 그 입증으로써…’ 하는 식이다. 여러 의미를 한 문장에 담는 일문일단락(一文一段落) 문장이 읽는 이를 헷갈리게 만든다. 한문 투의 어려운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흠결한(欠缺·빠뜨린)’ ‘위자할(慰藉·위로하고 도와줄)’ ‘편취한(騙取·속여 뺏은)’ 등등.

▷어렵고 긴 문장은 검찰도 예외가 아니다. 검사가 작성하는 영장이나 공소장 역시 판결문과 별로 다르지 않다. 검찰은 12·12쿠데타 혐의로 1995년 12월 전두환 노태우 피고인을 기소하면서 공소장을 한 문장으로 작성했다. 무려 6700여 자, 200자 원고지 34장 분량이다. ‘위법하다고 아니할 수 없어 파기를 면할 수 없다 할 것이다’와 같은 늘어뜨리기 관행을 두고 장문병(長文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요즘 러시아에선 ‘유코스 판결문’이 화제라고 한다. 내용보다도 길이가 관심사다. 2003년 조세 포탈 혐의로 전격 구속된 석유회사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전 회장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재판부가 10일째 하루 2∼6시간 판결문만 읽고 있다는 것이다. 판결문이 1000쪽이 넘는 데다 규정상 선고 전에 판결문 전문(全文)을 낭독하도록 돼 있어 선고공판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호도르코프스키 전 회장은 1996년 국영 석유회사였던 유코스를 인수해 세계적인 석유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한때 40세 이하에선 세계 최고의 부호라는 소리를 들었고 2003년 대선을 앞두고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부상했다. 크렘린궁이 ‘손볼 대상’이란 소문도 나돌았다. 그에 대한 재판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그의 지지자들을 지치게 만들려고 재판을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판의 독립은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송대근 논설위원 dk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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