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투자가 “무시하면 큰코다쳐”

  • 입력 2005년 5월 26일 0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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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9일 미국 HP 주주총회.

HP와 컴팩의 합병이라는 초대형 안건을 두고 합병 반대파인 HP 창업주 휼렛가(家)와 합병 추진파인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의 표 대결이 시작됐다.

미국 언론들조차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의 대통령 선거 때보다 예측이 어렵다”고 할 정도로 양쪽 세력은 팽팽했다.

개표 결과 합병 추진파인 피오리나 회장 측이 3% 차로 승리했다.

양측이 마지막까지 설득에 공을 들였던 ‘캐스팅보트’ 도이체방크가 결국 피오리나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두 초거대기업의 합병은 기관투자가 도이체방크의 손에서 결정이 난 셈이다.

○기관투자가, 주주로 행동하기 시작하나

이후 미국 증시에서는 ‘기관투자가의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에 대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됐다.

기업 공개 이후 최대주주가 반수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기업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대형 투자자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으면 한 기업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기 때문.

하지만 한국에서는 주주로서 행동에 나서는 기관투자가가 많지 않다.

상장기업 기업설명(IR) 담당자는 “몇몇 기관투자가가 비공식적으로 배당을 많이 하라거나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주총에서 자신의 견해를 활발히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그런데 올해부터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주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3월 31일 최대주주인 정부가 결정한 한국가스공사 오강현 사장의 해임안에 대해 한국투신, 삼성투신, 신한BNP파리바투신, 슈로더투신, 랜드마크투신 등이 반대표를 던졌다.

우리금융지주 황영기 회장 등 임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 안건에 대해서는 LG투신, 한국투신, 신한BNP파리바투신 등이 반대했다.

이 밖에도 하나은행 임원의 스톡옵션 부여와 외환은행 임원 스톡옵션 부여, 엔씨소프트 정관 변경 등의 안건에 대해서도 기관투자가들이 반대했다.

○ 산적한 과제들

올해 들어 부쩍 늘어난 이런 현상은 주식형 펀드에 몰린 돈의 위력으로 기관투자가들의 입김이 한층 세졌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기 펀드의 경영권 공격이 잦아지면서 국내 기관투자가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도 기관이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

시민단체가 주도했던 주주행동주의와는 다른 모델이 필요했다는 점도 기관의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었다. 시민단체의 주주행동주의는 기업가치보다 공익 추구에 비중을 두고 있어 오로지 기업가치를 높이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주주행동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투신사들은 대부분 대기업 계열사여서 기업지배구조 문제처럼 자신이 속한 그룹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서는 문제 제기를 꺼린다.

또 기껏해야 투자기간이 1년을 넘지 못하는 단기투자가 많은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를 높이는 제대로 된 주주 행동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있다.

한화증권 최현재 연구원은 “장기투자가 정착되고 기업과 기관이 허심탄회하게 의사소통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기관의 주주행동주의가 기업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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