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윤종] 문화예술 사랑 天上에서도…

  • 입력 2005년 5월 25일 03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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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기자에게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박성용(朴晟容)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이 보낸 이 편지는 ‘호소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앞으로 어린이들의 문화예술 교육에 주력하고 싶습니다. …순수 예술의 아름다움을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편지는 이어 불우 청소년에 대한 문화 지원을 간곡히 요청했다.

마침 금호문화재단의 ‘유럽 순회 문화사절단’ 공연을 위해 출국한 박 회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정관계 인사와 초중고교 등에 7700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데 모르는 분이 많아 알려 드리려 한 거죠. 허허.”

그러나 그의 편지 대부분은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박찬 한국메세나협의회 사무국장은 “그렇지만 실망하지 않은 채 ‘조금씩 바뀌어 나갈 거요’라며 오히려 직원들을 격려했다”고 회고했다. 이 편지를 받았던 많은 사람이 23일 세상을 떠난 그를 그리워하게 될지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그의 문화예술 사랑은 때로 짝사랑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지원했던 연주가에게서 ‘박 회장의 혹평으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정혜자(鄭惠子) 금호문화재단 부사장은 “박 회장은 미국 병원에서 투병 중에도 예술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박 회장은 자신이 지원해 온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가 21일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승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산소호흡기를 낀 채 종이에 ‘장하다. 잘하라고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이는 것은 그가 ‘재력뿐 아니라 예리한 감식안을 갖춘 문예지원가’(김승근 서울대 국악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금호문화재단 관계자들은 “박 회장은 떠났어도 금호의 예술 지원은 흔들림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거듭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금, 더는 ‘걸출한 개인’에게만 문예 지원의 막중한 책임을 지울 수 없다. 고인의 빈소를 찾은 많은 사람은 이제 재계 전체가 문화 육성에 나서서 사회의 문화적 부를 키우고, 이에 대해 감사와 응원을 보내는 선(善)순환 모델을 이룰 때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영정 사진 속 박 회장의 미소도 그런 당부를 담은 듯이 보였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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