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호에 날개를 달다
박인천(朴仁天) 금호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일리노이대와 예일대 등에서 수학했다.
예일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8년 귀국해 대통령경제비서관과 경제기획원 장관 특보 등 공직생활을 했다. 이어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부친의 권유로 1972년 금호실업 부사장에 취임하면서 경영에 입문했다. 관계(官界) 학계 경제계를 두루 거친 셈이다.
박 명예회장은 박 창업주가 타계한 1984년 그룹 총수에 올라 계열사 간 합병과 비수익사업 정리 등 과감한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취임 당시 6900억 원이었던 그룹 매출을 1995년 4조 원으로 끌어올리는 기반을 마련하는 등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제2창업을 주도했다는 평을 듣는다.
1988년엔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해 항공운송사업에 진출했고 금호타이어를 세계 10위권의 타이어 업체로 만드는 등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제2창업을 이끌었다.
고인은 1996년 창업 50주년을 계기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젊은 경영인이 사령탑을 맡아야 한다”며 동생인 고 박정구(朴定求) 회장에게 총수 자리를 넘겨줬다.
총수에서 물러난 뒤엔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해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활동에 적극 투신했다.
○ 끊임없는 사회공헌 노력
박 명예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장학사업과 문화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광주에 있는 금호고등학교, 중앙중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 금파공업고등학교 등 죽호학원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교육과 육영사업에 앞장서 왔다.
1995년엔 광주과학기술원 내에 금호정보통신연구소와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를 건립해 국내에 단 7개뿐이던 슈퍼크레이컴퓨터를 도입해 기증하는 등 산학협동체계를 이루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해외출장을 가더라도 저녁에는 음악회, 낮에는 틈틈이 박물관을 찾았다. 특히 1996년 그룹 회장 직에서 물러나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뒤엔 거의 매일 밤 연주회장을 찾거나 음악인들을 만났다.
금호문화재단이 2000∼2003년 음악 미술 장학사업에 지원한 금액만도 약 128억 원이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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