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5>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24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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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첫 번째 공성(攻城)에서 얻은 것 없이 군사만 상하고 물러났으나 패왕 항우의 기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벽에서 물러난 장졸들을 배불리 먹이고 쉬게 하더니 날이 저물기 바쁘게 다시 형양성 성벽 위로 내몰았다.

“적은 낮의 싸움으로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서운 기세에 반쯤은 얼이 빠져 있을 것이다.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말고 몰아붙여 오늘밤으로 형양성을 우려 빼자!”

패왕이 그렇게 외치며 다시 장졸들의 앞장을 섰다.

그러나 한군(漢軍)의 대비도 만만치 않았다. 수많은 횃불에다 화톳불까지 곁들여 성벽 위를 대낮같이 밝히고 기다리다가, 함성과 함께 성벽을 쳐들어오는 초나라 군사들을 맞았다. 낮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군(楚軍)이 성벽으로 다가들 때까지는 활과 쇠뇌를 쏘고, 성벽을 기어오르면 그 머리 위로 통나무와 돌덩이를 내던졌다. 더러는 끓는 물과 기름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도 어둠 속이라 그런지 이번에는 낮보다 더 많은 초군 장졸들이 성벽 위로 기어올랐다. 그 바람에 성벽 위에서 한바탕 피투성이 싸움이 벌어졌지만 초군은 그리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특히 패왕이 앞장선 동문 부근의 성벽 위가 그랬는데, 기세 좋게 기어오른 100여 명의 초나라 군사들도 끝내는 한군의 매서운 반격을 받아 바람에 쓸린 가랑잎처럼 성벽 아래로 다시 떨어져 내렸다.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라. 아무래도 밝은 날 다시 채비를 갖춰 싸우는 게 좋겠다.”

밤이 깊어 이제는 창검 부딪는 소리와 성벽을 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장졸들의 구슬픈 비명소리마저 잦아지자 항우가 마침내 그런 명을 내렸다. 더 고집을 부려 보려 해도 마련된 공성 기구가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다시 성벽 위로 몰아댈 장졸도 별로 없었다. 같은 장졸을 하룻밤에 두 번씩이나 화살비와 돌 우박 사이로 내몰 수는 없었다.

다음날 웬일인지 패왕은 하루 종일 장졸들을 쉬게 했다. 그리고 늙고 힘없는 후군(後軍)과 시양졸(시養卒)들을 풀어 하루 종일 인근에서 공성에 쓸 기구와 물품들을 거둬 오게 했다. 부서진 구름사다리를 다시 얽을 장대와 막대, 성문을 사를 불쏘시개와 장작, 먼저 성벽 위 적의 기를 꺾어놓기에 넉넉할 만큼 쏘아붙일 수 있는 활과 화살을 만들 재료 따위였다.

패왕의 불같은 성화에 다시 형양성을 들이치는 데 쓰일 기구와 병기의 자료들이 그날 한낮으로 대강은 거둬졌다. 패왕은 다음날 아침 세 번째로 전군을 들어 성을 칠 작정으로 장졸들을 다그쳐 밤새 공성에 필요한 모든 채비를 갖추게 했다. 그런데 날이 저물기 바쁘게 범증이 찾아와 말했다.

“대왕. 오늘밤 다시 한번 형양성을 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직 채비가 갖춰지지 않았소. 내일 밝은 날 채비를 갖춰 끝장을 내겠소.”

“아닙니다. 성안에 있는 적에게 쉴 틈을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삼경이 되기 전에 반드시 군사를 내어 적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제 하루 두 번이나 무리하게 성을 들이치는 동안 상한 우리 군사의 목숨 값을 이제 받아 내야 합니다.”

비로소 그런 범증의 말에 딴 뜻이 있음을 알아차린 패왕이 우기는 말투를 없애며 물었다.

“아부(亞父),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상한 우리 군사의 목숨 값을 받아 내다니요?”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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