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씨 “우리가 어디 와 있는지 모르겠다”

  • 입력 2005년 5월 23일 0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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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문열(李文烈) 씨가 현 세태에 관해 또다시 특유의 비판을 쏟아냈다. 이 씨는 20일 오후 서울대 총동창회 초청으로 미국 워싱턴 근교의 메리어트호텔에서 ‘한국의 이념적 주소’를 주제로 강연하며 “지금 주도세력을 비판·불신하면서도 대안을 내놓을 수 없거나, 대안세력이 안 보인다는 게 더 비관적이고 우울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날 강연과 질의응답의 주요 내용.

“권력 실세들이 세계 역사를 해석하는 것을 보면 노골적인 반미 성향과 친중(親中) 의식이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20년 전이라면 깜짝 놀랐을 일들이 거리낌 없이 일어난다. 북한 미사일 방어용인 패트리엇 미사일 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광주에서 벌어졌다.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나 경찰은 1명도 연행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

우파의 ‘자살골’이 많다. 어떤 이는 ‘한일합방이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합방되지 않고 일본에 합방된 게 다행’이라는 말이 과장됐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축복’이라는 말은 이상한 자살골이다. 또 어떤 보수 논객이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향해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할 사람들이 왜 거리에 나와 설치느냐고 말하는 걸 보면서 정신적으로 돈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조심스러운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혁명을 당한 것 아니냐’고 말하고, 아주 비관적인 사람들은 ‘이제 적화는 끝났고 통일만 남았다’며 자조한다.

비관적인 이유는 집권 세력에 대해 당파적 신조를 가진 반대파가 많다는 점이다. 더 비관적이고 우울한 것은 대안이 돼야 할 보수세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뉴 라이트 운동이나 사람 중심의 ‘무슨무슨 사모’ 등이 나오지만 대안으로선 미흡하다. ‘○사모’는 모조품이다. 모조품이 진품을 이기진 못한다.”

―효순, 미선 양 추모시위에 모인 10만 명은 용공분자들이 아닌가.

“(용공분자는) 그중 많아도 3000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용공세력이라면 북한과 커넥션이 있고 북한의 자금을 수수하거나 북한의 지령이 있을 때만 써야 하고, 그런 말도 조심스럽게 써야지 잘못 쓰면 말하는 사람이 우스워지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서울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은 학연 타파보다 일종의 반(反)지성주의의 발로로 보인다. 교육인적자원부 안대로라면 대학 진학은 내신이 결정하고, 교원이 내신을 정한다. 만약 이 교원들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이념으로 통일되면 나중에 대학 가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성이 좋아야 김일성대학 가듯 된다. 학력의 우열에 따라 학생을 뽑는 게 아니라 당성 비슷한 것, 말하자면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교원들에 의해 높은 점수를 많이 받은 학생이 가장 좋은 대학에 가는 형태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다.”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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