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2>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19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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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 유방이 마지못해 성가퀴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패왕 항우의 말을 받았다.

“유(劉) 아무개는 여기 있소. 대왕께서는 무슨 일로 과인을 찾으시오?”

말은 공손하게 존대를 했지만 그 말투나 표정은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한왕의 얼굴을 보자 패왕의 얼굴이 이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왕이 여러 제후들을 이끌고 비어있는 팽성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친 일이 새삼 분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그 마당에도 꼬박꼬박 존대를 올리며 겸손한 척하는 그의 의뭉스러움이 더 미웠다. 저 홍문(鴻門)에서도 신(臣)과 제(弟)를 아울러 칭하며 비굴하게 비는데 속아 그물에 걸린 고기 같던 한왕을 놓쳐버리게 되지 않았던가.

“장돌뱅이 유계(劉季)야. 너는 과인이 이른 줄 알면서도 어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지 않고 무얼 하느냐? 지금이라도 네놈이 항복하면 과인의 진중에 잡혀 있는 네 늙은 애비 어미와 못생긴 계집을 풀어줄뿐더러, 그것들과 함께 풍패(豊沛)로 돌아가 곱게 늙어죽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 허나 네놈이 허풍을 떨며 뻗대다가 성이 떨어지는 날에는, 뉘우쳐도 이르지 못하는(後悔莫及) 지경에 이를 것이다. 네 고기로 젓을 담가 천하 곳곳에 돌려 과인에게 맞서려한 네 죄가 얼마나 큰지를 뭇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겠다.”

패왕이 대뜸 소리를 높여 그렇게 한왕을 꾸짖었다. 그러나 한왕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유들유들한 얼굴로 패왕을 내려보며 깨우쳐 주듯 말했다.

“대왕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과인은 통 알아듣지 못하겠소. 대왕과 과인은 다같이 포의에서 몸을 일으켰고, 공을 이룬 뒤에는 또한 둘 모두 의제(義帝)로부터 봉지(封地)와 왕호(王號)를 받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소. 대왕이 비록 의제를 해쳤으나, 이는 제후로서 천자를 시해한 것이지, 그 일로 대왕이 곧 천자가 되어 과인보다 높이 된 것은 아니외다. 지난 여름 과인의 향리를 짓밟고 부모처자를 잡아간 것도 같은 제후로서 지나친 짓인데, 이제는 무슨 천자라도 된 것처럼 도리어 내게 죄를 묻겠다니 이 무슨 무례요?”

“저놈이 아직 제 죄를 모르고 찢어진 주둥이라고 함부로 놀리는구나. 너는 과인이 진나라의 주력(主力)을 맞아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는 동안에 잔꾀와 요행수로 먼저 관중에 들어와 진나라의 옥새와 보물을 모두 차지하였다. 그 죄만해도 백번 죽어 마땅하나, 홍문의 잔치에서 목숨을 애걸하는 네 몰골이 가긍하여 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래도 함께 싸운 옛정을 살려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까지 떼어주며 왕으로 봉했다. 그런데도 네놈은 제 분수도 모르고 봉지를 뛰쳐나와 삼진(三秦)을 삼키더니, 급기야는 과인의 도읍인 팽성까지 노렸다. 제후들을 위협하여 군사를 부풀린 뒤에 과인이 잠시 비워둔 팽성으로 불시에 치고 들어와 보름 동안이나 갖은 분탕질을 쳤다. 이에 과인은 3만 정병을 몰아 네놈의 56만 대군을 사수(泗水)와 수수(휴水)에 모조리 쓸어 넣고, 다시 한 갈래 군사를 풍패로 보내 네 가솔들을 잡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대군을 내어 그 모든 행악과 분란의 원흉(元兇)이 되는 너를 잡으러 왔거늘 그래도 네 죄를 모르겠느냐?”

원래 패왕이 그리 잔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왕이 워낙 유들유들하게 나와서인지 패왕이 하나하나 한왕의 죄를 꼽으며 길게 꾸짖었다. 그래도 한왕은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받았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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