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오! 지름신께서 강림하셨도다

  • 입력 2005년 5월 19일 15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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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네티즌)들이 첨단 디지털 기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지름신’ 때문에 아우성이다. ‘지름신’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지름족’은 첨단 기기를 먼저 써본 경험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젊은 세대의 소비 성향을 상징한다.
누리꾼(네티즌)들이 첨단 디지털 기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지름신’ 때문에 아우성이다. ‘지름신’에 빠진 이들을 가리키는 ‘지름족’은 첨단 기기를 먼저 써본 경험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젊은 세대의 소비 성향을 상징한다.
디지털카메라 사이트인‘디씨 인사이드(www.dcinside.com)’ 직원 이모(27) 씨는 점심을 자주 라면으로 때운다. 다른 직원들은 지나가다 그를 보고 한 마디씩 한다.

“또 뭘 사려고 그래?”

디지털 기기 마니아인 그는 최근 최신형 소니 바이오 노트북을 샀다. 이 씨는 “구경만 하러 갔는데 ‘지름신’이 강림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노트북을 질러버렸다”고 말했다.

‘지름신’이란 ‘지르다’는 우리말과 ‘신(神)’이 결합된 신조어. ‘내기를 걸다’ ‘힘껏 건드리다’라는 ‘지르다’의 사전적 의미를 ‘일단 물건을 사고 보다’로 변용한 뒤 신을 결합시킨 조어다. 누리꾼들 사이에선 신제품을 보면 일단 사도록 부추기는 가상의 신으로 통한다.

‘지름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패러디. 박찬욱 감독이 제작 중인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포스터 패러디.

이번엔 니콘의 디지털 SLR 카메라를 지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이 씨는 “지름신이 강림할 때는 사랑에 빠진 것처럼 한순간에 눈이 뒤집힌다”며 “집에서 알면 난리나니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블로그 제공 사이트인 이글루스닷컴(www.egloos.com)에 있는 블로그 ‘뽐뿌 인사이드(bikblog.egloos.com)’ 운영자 고진우(32) 씨는 디지털 기기의 사용 후기를 쓰며 하루하루 ‘뽐뿌와 지름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IT 칼럼니스트다. 뽐뿌란 ‘펌프(pump)’의 속어로 펌프질을 하듯 ‘지르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애플의 MP3 플레이어 ‘아이팟 셔플’용의 알루미늄 케이스에 대한 그의 글에 달린 답글.

‘흑, 플레이 스테이션 포터블(PSP)에 뽐뿌받고 있는데 이거까지 뽐뿌받으면 감당이 안돼요. ㅠ.ㅠ.

뽐뿌와 지름은 자신의 의지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ID Eyez)

○ 디지털세대 新소비문화

최근 인터넷에는 지름신을 경험했다는 누리꾼(네티즌)들이 가득하다.

유행어를 해설해 주는 네이버 오픈 사전에 따르면 지름신이란 ‘예쁘거나 기능이 우수한 제품을 볼 때 멀쩡하던 사람에게 강림해 일시적이고 강력한 뽐뿌 현상을 일으키며 구매를 부추기는 신’이다.

지름신은 생활필수품을 살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동통신 기기나 PSP 같은 게임기 등 최첨단 유행제품을 봤을 때만 나타난다는 것.

지름신이 와서 물건을 지른 사람은 강력한 쾌감인 ‘지르가즘’을 느낀다고 한다.

누리꾼들은 “지름신은 통장의 잔액이 높을수록 힘이 커져 더 비싼 것을 지르도록 하며 지름신 뒤에는 그 형님인 파산신이 온다”며 “가장 무서운 것은 파산신 다음에 오는 망각신으로 지름신과 파산신 때문에 겪은 고난을 잊게 하고 다시 그들에게로 이끈다”고 말한다.

인터넷에는 지름족의 패러디가 넘쳐난다.

‘우리를 저금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신용불량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지름도문’은 기독교의 주기도문을 변형한 것이다. 경구나 속담도 패러디의 대상이다.

이순신 장군은 ‘부모님께 나의 지름을 알리지 말라’고,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질러라’고 말했다고 누리꾼들은 주장한다. ‘세 살 지름 여든까지’ 가며 ‘하늘은 지르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도 있다.

‘지름신 금자씨(영화 친절한 금자씨)’ ‘왕지름 선녀님(MBC

드라마 왕꽃선녀님)’ 등 포스터 패러디에다 최근에는 ‘있을 때 질러라’고 외치는 ‘지름보살’까지 등장했다.


왼쪽부터 MSN 메신저 7.0의 아이템인 지름보살, 지름신, MBC 드라마‘왕꽃선녀님’을 패러디한 포스터.

○ 지름족은 얼리 어답터 워너비

지름족은 신제품을 먼저 써보려는 고소득 전문직의 ‘얼리 어답터’와 다르다. 얼리 어답터는 구매력있는 오피니언 리더 계층으로 ‘남과 다른 물건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러나 지름족은 얼리 어답터가 되고싶은 ‘얼리 어답터 워너비(early adopter wannabe)’로, 돈이 뒷받침되지 않아도 이런저런 궁리를 통해 첨단 기기를 일단 사고 보는 소비문화를 가진 디지털 세대를 말한다. 즉 디지털 세대의 소비 문화 현상을 주도하는 이들로 인터넷을 통해 각종 할인 정보를 수집하는 합리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제일기획은 최근 디지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성장한 13∼24세 소비자를 ‘포스트 디지털 세대(PDG)’로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PDG는 최신 제품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갖고 있으며 갖고 싶은 것은 나중에 갚더라도 일단 구매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노력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PDG’는 지름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제일기획의 조사 결과 PDG의 46.4%는 ‘최신 제품을 갖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며 44.3%는 ‘정말 갖고 싶은 것은 일단 사고 본다’고 답했다. 이는 아날로그 세대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지름족은 유행 제품을 지르고, 그것을 화제로 삼는 데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즉 지름족은 PDG를 포함해 디지털문화에 익숙한 20, 30대 직장인 등 유행제품을 지르고 그것을 화제로 삼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구매를 ‘지름신 탓’으로 돌리기

도 하지만, 사실은 즉석 구매 행위를 통해 앞서 나가는 ‘첨단 심리’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다.

○ ‘작은 사치’를 위해 선택과 집중

지름족은 얼리 어답터만큼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소비의 선택과 집중을 전략적으로 구사한다. 이 같은 경향은 미국의 트렌드 분석가 페이스 팝콘이 ‘작은 사치(small indulgences)’로 분석한 것과 동일하다. ‘작은 사치’란 심리적 만족을 위해 구매 가능한 수준의 고급 물건을 소유하려는 행위로 21세기 트렌드다.

물론 모든 물건이 지름의 대상이 되지만 인터넷 중심으로 생활하는 젊은 세대의 특성상 디지털 기기에 지름족이 몰린다. 지름족은 제품 정보와 가격을 꼼꼼히 비교한 뒤 제품을 구입하고 정보 교환을 위해 사용 후기를 블로그에 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 같은 성향은 합리적인 지름을 위한 것으로 충동구매와 다른 셈이다.

특정 브랜드의 제품에만 열광해 국내에 출시되지 않으면 해외 사이트를 통해서 사는 ‘소빠(소니 빠돌이)’ ‘아빠(아이리버 빠돌이)’ 등도 지름족의 일원들이다.

지름신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신용 불량의 늪. 지름족인 한 직장인(27)은 “갖고 싶은 물건을 위해 현금을 열심히 모아 두었다가 생활비만 남기고 산다”며 “신용카드는 악마의 유혹으로 이 바닥에서 카드 맛에 들리면 곧장 파산신이 강림한다”고 말했다.

지름족은 중고 판매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기도 한다. 회사원 김동욱(28) 씨는 “최근 소니 PSP를 질렀다가 일주일 만에 팔았다”며 “새 물건을 사고 써 보는 것이 좋아 일주일이나 열흘만 지나면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다른 것을 사기 때문에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 유독 별난 한국의 지름족

한국인들의 ‘지름’ 성향이 유별난 것도 사실이다.

LG경제연구원 문권모 선임연구원은 “한국인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호기심이 많으며 ‘빨리빨리’ 기질 때문에 기기 변경 욕구도 강하다”며 “근본적인 이유는 정보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고속 인터넷 덕분에 ‘뭐가 좋다’는 정보가 빨리 확산되면서 ‘소비의 동질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 이주현 박사는 “이런 한국 소비자들의 성향은 기업들이 외국보다 먼저 첨단 제품을 내놓게 하는 긍정적인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미니 홈피와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용 후기들은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다.

지름신은 또 사이버 에고(cyber ego·사이버 공간에서 형성되는 자아)’의 표현 수단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지름신이 강림해 샀다는 말은 일종의 ‘합리화(rationalization)’이지만 그 첨단 물건이 자아의 표현 수단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씨는 “이런 이들은 경쟁적이며 강박적인 경향이 있기도 하고 물건 구매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온라인에서 사이버 에고가 상승되는 기분을 즐긴다”며 “그러나 지나친 충동구매를 막기 위해 합리적으로 지르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디지털기기 언제 어떻게 사야하나▼

지름족이나 얼리 어답터가 아니라도 최신 제품에 마음이 끌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일이 멀다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디지털 기기들은 언제 어떤 것을 사야 할까.

정보기술(IT) 칼럼니스트 고진우 씨는 “필요한 기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구매를 결정했다면 다른 제품에는 눈을 돌리지 말라”고 조언했다.

노트북은 웬만한 성능의 제품들은 200만 원이 넘지만 최근 70만∼140만 원대의 저가형 제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가형 제품들도 문서작업이나 인터넷 서핑, 포토샵 등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3D 게임이나 동영상 편집을 자주 하는 이들에겐 부적합하다.

신제품 출시가 활발한 MP3 플레이어는 최근 동영상을 볼 수 있는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도 나왔다. 고 씨는 “기능은 상향 평준화 됐고 성능은 거의 포화 상태”라며 “중요한 선택 기준은 소리와 디자인”이라고 말했다. 음질은 비슷하나 제품마다 음색이 다르므로 오프라인 매장에서 들어보고 사야 한다.

디지털 카메라는 일상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정도라면 400만∼500만 화소로 충분하다. 최근 렌즈 탈부착이 가능한 고가의 SLR 카메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사진을 자주 인쇄하는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제품이다.

휴대전화는 카메라와 동영상 촬영, MP3 재생기능까지 포함된 게 대세. 그러나 모델에 따라 주력 기능이 다르므로 어떤 기능을 자주 사용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500만 화소나 700만 화소의 디카가 달린 휴대전화도 나와 있지만 이로 찍은 것은 전문 디카보다 색감의 차이가 난다. 그냥 즐기는 정도의 폰카는 100만∼200만 화소급이면 충분하다.

고 씨는 “최근 위성DMB와 게임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가 출시되고 있으나 아직 콘텐츠가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있다 기기변경을 하라”고 말했다.

가정용 캠코더는 동영상 화소가 60만∼100만의 제품이 적당하다. 캠코더와 카메라 기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 영상과 사진 중 어느 기능을 더 비중있게 사용할지 감안해야 한다. 테크노마트 박상후 홍보팀장은 “캠코더는 정지 화소가 68만 내외의 제품이 많은데 웹 저장은 무리가 없으나 사진으로 인화하면 이미지가 깨진다”며 “사진을 인화하려면 정지화소 200만 내외의 제품을 골라야 한다”고 말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얼리 어답터(adopter):

첨단 기술을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는 ‘채용하다’ ‘받아들이다’는 뜻의 어답트(adopt)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붙인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가 1957년 저서 ‘디퓨전 오브 이노베이션(Diffusion of Innovation)’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90년대 후반 신조어로 부상했다.

▼지름신 관련 패러디▼

* 짐이 곧 지름신.

* 돈다발이 세 뭉치라도 질러야 보배.

* 사재기도 지름이다.

* 돈이 다 떨어져도 지를 구멍은 있다.

* 파산하지 않은 자 지름을 논하지 말라.

* 오늘 지름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지름은 길고 인생은 짧다.

* 지름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다만 파산할 뿐이다.

* 한쪽 통장이 비거든 다른 통장도 지르거라.

* 물품을 보고 지르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 하늘은 지르는 자를 돕는다.

* 모로가도 지르기만 하면 된다.

* 지름은 저축보다 강하다.

* 질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 나는 지른다, 고로 존재한다.

* No Girum, No gain.

* 저축하는 자 위에 소비자 있고, 소비자 위에 지름신 있다.

* 질러라 그러면 얻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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