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指’논란 관련 이광재 의원 19일 글 전문

  • 입력 2005년 5월 19일 09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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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하기도 이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제 삶의 상처에 대해 밝힙니다.

1986년 저는 제 스스로 제 손가락을 버렸습니다.

제 나이 21살 때였습니다.

80년대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제 손가락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85년부터 86년까지 체포와 투옥, 고문과 분신이 줄을 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시위를 주동할 예정이었고, 그 결과 당연히 감옥으로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은 운동을 계속해주기를 권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감, 1남 6녀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분노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당시 저를 지배한 정서였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전국 학생운동연합기관지 “백만학도”를 만들고 있던 저를 향한 수사망도 점점 더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 상황으로는 도저히 상상할수 없는 이야기지만,

어느 날 세미나가 끝난 후 너무 착하고 여린 동급 여학생이 성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차라리 동급생과 자고 싶다고 울부짖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망하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보자”라는 것이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만 받더라도 실형으로 간주돼 군대 에 갈수 없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제게 군 입대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입영을 한다 해도 군에 정상적으로 복무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군에 가는 즉시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고,

고문을 못 이겨 동지의 이름을 불게 되면 동지들이 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 배신의 기억을 지니고는 영원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결벽증이 있었던 듯 싶습니다.

열사의 분신과 고문소식들이 잇따르던 어느 날, 저는 부모님이 주신 제 손가락을 버렸고, 태극기에 혈서를 썼습니다.

‘절대 변절하지 않는다.’

그 피 묻은 태극기는 이화여대 다니던 한 선배에게 주었습니다.

저를 지켜봐 달라고....

춘천 입영소에서 면제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루 후 집에 전화를 하니 예상대로 저를 잡으러 수사관들이 들이닥쳤고, 저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충청도에서 막노동을 하고, 부산에서 주물공장 등을 전전하다가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수십일 동안 조사를 받았고 감옥을 살았습니다.

출소 후 그 선배가 “태극기를 돌려줄까?” 하길래

“다 지난 일인데요. 뭐”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20년간 술잔을 받을 때나, 아이들이 제 손가락이 이상하다고 만져 보려고 할때나, 그리고 어찌해서 손가락이 그리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많은 아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저의 단지 이야기는 제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제 상처에 관한 것입니다.

앞뒤의 문맥, 그리고 시대 상황을 다 버리고 이것을 군기피를 위한 단지라고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제가 힘든 시기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제 자신을 채찍질 하는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주위 몇 분들이 손가락 수술을 권했지만, 저는 그때의 상처와 다짐을 간직하고 살기 위해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 저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2005.5.19

국회의원 이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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