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윤보선대통령 1차 하야 성명

  • 입력 2005년 5월 18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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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덕(德)이 없는 이 사람이….”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1961년 5월 19일.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언론사에 배포한 하야(下野) 성명은 이렇게 시작해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국가원수 직에 있어 온 이래 국민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을 평안치 못하게 한 책임이 크고, 군사혁명이 발생되도록 이르게 한 국가적 모든 현실을 나의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부담시키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다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모든 국가적 어려움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리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윤보선은 다음날인 20일 하야 성명을 취소해야 했다. ‘지금 대통령이 사임하면 한국은 외교상 무정부 상태가 되고 북괴군이 남침하면 유엔이나 자유우방국에 도움을 호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김용식(金溶植) 외무부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였기 때문.

이날 오후 4시로 예정돼 있던 ‘하야 기자회견’은 오후 6시 ‘하야 번의(번意) 기자회견’으로 바뀌었다.

윤보선은 회견에서 “나의 하야 결정이 국제적, 국내적으로 영향이 크다고 하므로 나랏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만부득이 (하야를) 번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그의 청와대 생활은 ‘악몽’이었다. 윤보선 회고록 ‘구국의 가시밭길’의 한 대목.

“내 청와대 생활은 거짓 없이 바늘방석에 앉은 격이었다. 그보다 더 불안하고 부자연한 생활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 바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뿐인 대통령이지만 명분 없이 대통령 직을 물러날 수는 없었다.”

1962년 3월 22일에야 그는 두 번째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뤘다.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 지연에 분노하고, 야당 정치인 탄압을 위한 ‘정치활동정화법’ 제정에 절망한 뒤였다.

이 성명도 첫 번째 성명처럼 “원래 덕이 없는 이 사람이…”로 시작해 “국가원수 직에 있었던 1년 8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해서 나는 그 책임을 느끼는 바입니다”라는 자책론(自責論)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날 고별 기자회견에서 “이 자리를 그만두게 되니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끝없이 자신의 부덕(不德)을 탓하면서도 청와대를 떠나지 못했던 그는 과연 무엇이 시원하고 무엇이 섭섭했을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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