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1>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18일 19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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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못난 신(臣) 주발이 대왕을 뵙습니다. 형양성의 양도(糧道)를 지켜내지 못한 죄를 엄히 벌하여 주십시오.”

주발이 한왕 앞에 엎드리며 먼저 죄부터 빌었다. 버틸 대로 버티다가 쫓겨 온 흔적이 온몸에 역력했다. 한왕이 주발에게 다가가 싸안듯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장군이 초나라의 두 맹장(猛將)과 맞서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은 과인도 일찍 들었다. 진작 한 갈래 군사를 내어 장군을 도와야 했으나 형양성의 형세가 불안하여 그리하지 못했다. 이 모두가 과인이 모자란 탓이니 장군은 스스로를 너무 허물하지 말라!”

그리고 오히려 주발을 위해 크게 잔치를 열고 그가 이끌던 장졸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렸다.

그런데 주발이 형양성 안으로 쫓겨든 그 이튿날이었다. 성 밖으로 나갔던 탐마(探馬)들이 잇달아 뛰어들며 다시 급한 소식을 전해왔다.

“패왕이 군사를 하나로 모아 형양으로 다가들고 있습니다. 지금 동쪽 3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가만히 항오를 정비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형양성을 에워싸고 들이칠 듯합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한왕이 장량과 진평을 불러 물었다.

“이제 곧 형양성은 초나라 대군에게 에워싸일 것이오. 아직 성문을 드나들 수 있을 때 반드시 해두어야 할 일이 무엇이겠소?”

“먼저 각지로 사자를 보내 항왕의 등 뒤를 어지럽게 하는 일부터 재촉해야 합니다. 대장군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조나라와 인접한 땅에 있는 초나라의 군사들을 공격하게 하고, 팽월에게도 사자를 보내 보다 활발하게 양(梁) 부근의 초나라 군사들을 유격(遊擊)하게 하십시오. 또 구강왕 경포도 형양성에 갇히기 전에 회남으로 내려 보내십시오. 경포의 군사는 이곳에서는 큰 힘이 되지 않지만, 회남으로 내려가 자기들의 옛 땅을 찾게 하면, 항백이 이끄는 초나라 군사들이라도 그대로 회남에 잡아둘 수 있을 것입니다.”

장량이 마치 묻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렇게 대답했다. 한왕도 이왕 도우러 올 원병(援兵)이 없다면 포위한 적의 압력을 줄여줄 우군의 유격전이라도 독촉하는 일이 옳다 여겼다. 곧 장량의 말대로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보내고, 경포도 서둘러 회남으로 내려가게 했다.

패왕 항우는 한왕 유방이 헤아린 것보다 재빨리 형양성을 에워쌌다. 다음날 새벽 날이 새면서 성루에서 망을 보던 한군은 어느새 성이 초나라 군사들에게 두텁게 에워싸여 있음을 보고 몹시 놀랐다. 종을 치고 딱따기를 두드려 여럿에게 그 일을 알렸다.

그 바람에 새벽잠에서 깨난 한왕도 동문 문루(門樓)로 나가 적의 형세를 살펴보았다. 성 밖 곳곳에 초나라 깃발이 휘날리고 네 성문 앞에는 각기 커다란 진채가 얽어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오리라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패왕의 진채를 마주보게 되자 한왕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서늘해왔다. 다시 팽성에서 당한 일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때 마치 한왕이 문루에 올라 보고 있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문루 앞 초군 진채의 진문이 열리며 한 장수가 말을 몰아 나왔다. 보검을 차고 오추마에 높이 앉은 패왕 항우였다. 패왕이 문루를 올려보며 대뜸 우레같이 소리쳤다.

“한왕은 어디 있느냐? 한왕 유방은 나와 과인의 말을 들어라!”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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