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스물한살에 스러진 막내아들의 뜻은…

  • 입력 2005년 5월 17일 18시 57분


코멘트
15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묘지.

70대 노부부가 1묘역 왼쪽 편 두 번째 줄에 자리한 아들의 묘비를 손수건으로 닦고 또 닦았다. 묘비 옆에는 하얀 국화송이와 조그만 영정이 놓여 있었다. 영정과 비석이 5월 햇살에 반짝거렸다.

‘묘지번호 1-47 임균수’. ‘동방의 명의(名醫)를 꿈꾸며 한의대 재학 중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그대여…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원력을 세우소서.’

묘비 뒷면에는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젊은 생을 마감한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임병대(林炳大·78·조선대 명예교수) 씨는 1980년 5월21일 ‘항쟁의 거리’인 광주 금남로에서 막내아들 균수(勻壽·당시 21세·원광대 한의대 본과 2년)씨를 잃었다. 균수 씨는 시위대열 맨 앞에 섰다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당시 조선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형 양수(亮壽·49·서강정보대학 소방안전관리과 교수) 씨도 5·18 피해자다. 부모님이 고향인 전북 순창에 간 사이 동생의 죽음을 알리려고 큰 누나 집으로 가다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서 40일 넘게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임 씨 부부는 균수 씨를 망월동 묘역에 묻었다. 한동안 생사를 몰랐던 양수 씨마저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돌아오자 임 씨 부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분노와 슬픔으로 세달 여 동안을 두문불출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들이 바라는 게 이런 것은 아닐거라고 여겨지더군요. 그래서 아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조선대 토목공학과 교수였던 임 씨는 81년부터 월급을 쪼개 아들의 모교인 전북 순창북중고와 광주 인성고에 매년 50만원의 장학금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기탁한 장학금이 2400만원. 임 씨는 아들 추모비가 세워진 원광대에는 89년부터 해마다 100만원을 보내고 있다.

1990년 7000만원의 정부 보상금이 나오자 어머니 강종순(姜宗順·76) 씨는 ‘돈을 헛되이 쓸 수 없다’며 사재 3000만원을 보태 상가 한 채를 구입해 임대료를 장학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3년 전 5·18 유공자로 인정된 양수 씨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두 분의 뜻을 좆아 내가 받은 보상금 6000여 만원을 보태 장학사업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임 씨 부부는 2000년 ‘연꽃봉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매달 순창에서 50여 명의 회원과 혼자 사는 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의 집을 찾아가 생필품을 전달하고 빨래를 해주고 있다.

‘나눔과 희생’이라는 ‘5·18 정신’은 임 씨 부부의 삶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