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신분상승 신화’ 더 이상 없다

  • 입력 2005년 5월 17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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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어느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는 A 씨는 학창 시절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에 시달렸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부잣집 아들인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꿈을 이룰 것을 다짐했다. 반드시 내 힘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리라고….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그는 직장 일에 온몸을 던졌다. 성실성과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지사에 근무하게 됐고 거기서 수출역군으로 맹활약했다. 승진을 거듭해 최고경영자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과거를 되돌아보며 작은 ‘코리안 드림’이나마 실현한 것을 자부하고 있다. 요즘 그는 소년소녀 가장을 몰래 돕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富-학력 대물림현상 뚜렷▼

기업인 고급관료 법조인 회계사 등 성공한 전문직 인사 가운데 A 씨처럼 역경을 딛고 ‘성공신화’를 이룬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어떤 이는 입사 초기 평사원 때 오너의 눈에 띄어 사위로 발탁돼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이야 외모에서도 ‘부(富)티’가 나지만 그들의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삐쩍 말라 ‘빈(貧)티’가 역력하다.

요즘 명문대 학생들의 상당수는 이들의 자녀다. 부모에게서 우수한 두뇌와 성실한 품성을 물려받은 데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으니 최상위권 대학 합격을 과점(寡占)하는 것이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가 해외에 체류한 적이 있다면 외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나게 마련이다. 토종 학생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기 어려운 외국어 말하기, 듣기의 고난도 장벽을 그 자녀들은 이미 가뿐하게 정복했다. 친구들이 토익, 토플 점수를 올리느라 진이 빠질 때 만점 가까운 점수를 올린 그들은 느긋한 미소를 짓는다. 글로벌 경쟁력이란 측면에서 유리한 고지에 올라선 셈이다.

이런 장점 덕분에 그들은 취업도 잘 된다. 대학 졸업 후 선진국에서 경영학이나 법학을 더 공부하고 금융 컨설팅 법률회사 등에서 일하면 연봉이 수십만 달러에 이른다. 부모의 재산을 믿고 헤프게 살아가는 부자 2세보다 전문 능력을 갖춘 그들이 유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순환 구조의 이면(裏面)을 보자. 열악한 환경에 있는 젊은이는 꿈을 이루기가 부모 세대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과거엔 어지러울 정도로 고속성장을 하던 때여서 개개인에게도 그만큼 계층 이동의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성장 속도가 떨어지면서 그런 기회가 현저히 줄었다. 부호의 아름다운 딸과 가난하지만 총명한 가정교사가 결혼하는 사례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드라마에서조차 보기 어렵다.

한국에서 부(富)와 학력에 따라 사회적 계급이 형성되는 듯하다. 계급이 다른 사람 사이의 혼인과 교류가 뜸해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미국에서도 ‘아메리칸 드림’이 쇠퇴하고 있다고 최근 미국 신문들이 보도하고 있다. 학력과 경제력 대물림 현상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부부 모두가 대졸자이면 자녀가 명문대학을 나와 부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 미국의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과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도 갈수록 미국에서 아메리칸 드림이 퇴색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가가 나서 꿈나무 키워야▼

‘코리안 드림’이 여전히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꿈틀거리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가난한 인재에게 주는 장학금을 늘리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참다운 벤처 정신을 살려야 하고 획기적인 기술개발에 성공한 이들에게 확실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전 가능성이 큰 꿈나무들을 사회적 자산이라 여기고 이들을 존중하고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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