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윤종기자의 올 댓 클래식]고난이 그대를 휩쌀지라도…

  • 입력 2005년 5월 17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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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스피커에서는 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잔잔한 합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감상실 창 밖의 현실세계는 평화롭지 않았다. 퍼퍼펑…. 이른바 ‘지랄탄’의 폭음이 캠퍼스를 뒤흔들었다. 환풍기를 꺼도 맵디매운 연기가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최루탄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매년 반복되는 농담이 나왔다. 후배는 울고 있었다. 눈이 매워서겠지. 그렇지만 우리는 ‘손님’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아도 감상실을 지켜야 했다. 감상실 선곡 관리자(DJ)의 시간표는 정해져 있었고, 일상은 계속되어야 했다.

“음악이 다 무슨 소용이람.” 혼잣말을 뱉었다. 전공 강의에서 배운 독일 문호 횔덜린의 ‘시가 무슨 소용인가, 이 궁핍한 시대에’라는 경구를 비틀어본 것이었다. 아름다운 시칠리아 전원을 배경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킨 단막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처음 무대에 올랐던 그 날짜(1890년 5월 17일)는,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신군부가 전국 계엄 확대와 함께 전면 등장한 날이었다. 그 다음날인 18일, 남녘 광주에서는 피의 학살이 시작됐다.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Mein Leben·우리나라에서는 ‘사로잡힌 영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에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조직된 유대인 오케스트라 이야기가 등장한다. 굶어 죽는 사람과 발진티푸스 희생자, 독일군에 맞아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속에서도 그들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대부분 가스실에서 삶을 마감할 운명이었지만, 변변한 악기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그 어떤 연주보다도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회상한다.

비슷한 시대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는 독일군의 포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물자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시민의 절반 이상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참상의 와중에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봉쇄가 한창이던 1942년 8월, 도시의 라디오 방송은 이 곡의 초연을 알렸다. 방위군이 곳곳에 중계 스피커를 설치했다. 비쩍 마른 단원들이 있는 힘을 다해 합주를 펼쳤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그 순간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

고난 속에서 가슴을 위로할 그 무엇을 찾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그러했다는 것을 60여 년 전의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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