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美國 압박하는 게 무슨 유행인가

  • 입력 2005년 5월 16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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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 온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김정일이 핵을 포기하도록 왜 미국이 대담한 해결책(a bold solution)을 내놓지 못하는가.” 힐 차관보가 받았다. “왜 당신들은 우리를 비난하는가. 당신들은 김정일을 나무라야 한다.”

힐 차관보는 그 회견이 있고 난 뒤 사석에서 “솔직히, 지금은 김정일을 한번 걷어차 줘야 할 때”라고 털어놓았다고 한다(미 시사주간지 타임 5월 9일자).

북한 핵을 둘러싼 논쟁의 양상이 대개 이렇다. 수많은 말과 글이 쏟아지고 있지만 요점은 ‘미국이 먼저 양보하느냐, 아니면 북한이 양보하도록 더 압박하느냐’다. 당신이라면 어느 쪽 손을 들어주겠는가.

북-미(北-美)가 평행선을 달리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와 그 이행 과정에서 양측이 서로 다른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벼랑 끝 전술로 나가야만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93, 94년의 핵 위기도 지금 못지않았지만 북한은 물러서지 않았고 그 대가로 연 50만 t의 중유 공급과 경수로 제공, 북-미관계 정상화 약속을 한꺼번에 챙길 수 있었다. 미국이 약속을 못 지킬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마침 경수로 완공 기한이 지켜지지 않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몰래 준비한 게 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이다.

▼北核 해결책 엇갈린 시각▼

미국은 거꾸로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아이가 운다고 요구를 들어주면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북한을 결코 믿어선 안 된다는 생각도 확고해졌다. 북한이라는 상대는, 제네바 기본합의 뒤에 숨어서 우라늄 농축장비나 사들이고 98년 금창리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핵실험을 하겠다”고 위협할 정도로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갖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안다면 답은 분명해진다. 양측에 똑같이 양보하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미국 보고만 먼저 한 발 물러서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를 누가 먼저 깼느냐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약속 위반의 경중(輕重)과 결과만 놓고 본다면 북한은 미국에 견줄 바가 아니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 보유국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그도 부족해 핵실험이란 전가의 보도를 들고 다시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런 북한에 ‘체제 보장’이라는 백지수표부터 끊어주라고 미국을 채근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미국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가 든든한 원군처럼 보인다. 그는 ‘핵무기 제로였던 북한이 부시 정권 아래서 6개나 갖게 됐으므로 부시의 대북정책은 실패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6개나 보유하게 된 북한은 놔두고 부시의 대북정책만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의문이다. ‘0 대 6’이 왜 부시만의 책임인가.

미국의 리버럴들은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이 크게 고민한 흔적도 없이 “미국이 풀어야 돼”라고 던지는 한마디가 북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놀라운 불감증과 반미 감정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北-美 조금씩 양보해야▼

북핵 문제는 결국 양측이 조금씩 양보해야만 풀린다. 지난해 6월 제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했던 이른바 ‘6월 구상(June Proposal)’도 북한의 핵 폐기와 체제 보장을 맞바꾸는 내용이다. 지금으로선 북한이 핵 폐기 의사를 천명하면 미국을 제외한 한-일-중-러가 대북(對北) 중유 공급부터 재개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법처럼 보인다.

어떻든 상호 양보와 제시된 조건들의 동시 이행을 통해서만 문제를 풀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양보를 주문하는 것만큼 북한의 양보도 주문해야 옳다.

미국을 두둔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일방적 양보로 북핵 문제가 해결될 경우 10년 넘게 끌어온 북핵 위기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없기 때문이다. 상황이 종료된 뒤 “역시 김정일이 핵 외교 하나는 잘해!”라고 찬사나 늘어놓을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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