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그들이 울고 있다

  • 입력 2005년 5월 16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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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지난달 중순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파산 전문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K(36) 씨.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유명 식품회사에 입사한 K 씨는 잦은 야근, 계속되는 주말출근에 몸이 녹초가 됐다. 고민 끝에 유명 제약회사의 이직 제안을 받아들여 4년 만에 직장을 옮겼으나 1998년 외환위기가 찾아오면서 그 회사에서도 사실상 쫓겨나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퇴사 후 친구들의 권유로 함께 벤처회사를 창업했지만 수천만 원의 빚만 떠안은 그는 결국 지난해 9월 법원에 파산신청을 했다.

사례2-10여 년간 탄탄한 학습지 회사에서 영업관리 과장직으로 근무하던 H(48) 씨는 2월 명예퇴직을 당했다. 그는 전직(轉職)컨설팅회사를 찾아가 석 달간 이력서 작성, 적성 검사, 구직 전략 등 재취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결국 그는 서울 시내 한 구청의 주차단속원으로 일하게 됐다. 1년 단위 계약직이라 신분이 불안한 데다 주차위반 차량을 단속하기 위해 도로를 하루 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 육체노동이다. 그러나 그는 “조직생활을 하면서 겪는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한국의 ‘화이트칼라(white-collar·사무직 근로자)’가 위기를 맞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과정에서 밀려난 이들은 탄탄한 직장, 경제적 여유, 단란한 가정의 꿈을 잃은 지 오래다. 계약직으로 새 출발을 하거나 자영업에 손을 대 보지만 환란 때 절반이상 쓴맛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화이트칼라들은 상시적인 구조조정체제에 따른 고용 불안과 높은 노동 강도 속에서 좌불안석이다.

신광영(申光榮)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조돈문(趙敦文)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이성균(李成均)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가 다음 달 발표할 논문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당시 화이트칼라의 절반 이상이 생산직 또는 계약직의 ‘하위 계층’으로 떨어졌다.

하층 비육체 노동자가 소득과 지위 면에서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는 상층 비육체 노동자로 올라선 비율도 7.5%로 스웨덴(39%) 미국(36.7%) 독일(21.1%)에 비해 훨씬 적다. 계층 하락을 겪은 화이트칼라 중 적지 않은 수가 아예 이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이민을 통해 선진국에서 화이트칼라로 정착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중산층에서 한번 밀려 나면 그 자리에 다시 오르기도 쉽지 않다.

실제로 2003년 노동부 자료를 보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실직자 37만5000여 명 중 사무직 출신(38.3%)이 다른 직종(단순노무직 17.1%, 기능원 및 관련 근로자 14.8% 등)에 비해 훨씬 많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화이트칼라 위기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부채 증가와 주식 투자 손실로 화이트칼라가 고소득 전문직과 저소득 사무직으로 구분되는 계층 내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도 특히 한국은 고용 불안에다 가족 간 유대감까지 단기간에 무너지면서 계층의 몰락이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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