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57>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5월 13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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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그러는 사이에도 형양 성밖의 형세는 나날이 한왕 유방에게 불리해져 갔다. 용저와 종리매가 길을 나누어 한군의 용도(甬道)를 들부수며 앞뒤에서 주발을 들이치니 오창에서 보내는 군량이 제대로 형양에 닿지 못했다. 오창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성을 에워싼 계포와 환초가 금세라도 끝을 볼 듯 성안의 조참을 몰아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난 8월 위표(魏豹)를 달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뒤로 줄곧 말이 없던 역이기((력,역)食其)가 한왕에게 뵙기를 청했다. 한왕이 반가워하며 역이기를 안으로 불러들이게 했다.

“오래 뵙지 못했소, 역 선생. 오늘은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내리시려고 찾아오셨소?”

“초나라가 옷깃을 여미고 대왕께 조회(朝會)하러 오도록 할 방책이 떠오르기에 이렇게 대왕을 뵈러 왔습니다.”

역이기가 별로 겸양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갈수록 몰리는 기분으로 울적해져 있던 한왕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어찌하면 그리될 수 있겠소? 과인이 귀를 씻고 들을 테니 그 방책을 일러주시오.”

그러자 역이기가 몇 번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옛날에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쳐부수어 내쫓고도 그 후손을 기(杞)나라에 봉해주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 주왕(紂王)을 쳐 없애고도 그 후손을 송(宋)나라에 봉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도덕을 저버리고 여러 제후국에 쳐들어가 육국(六國)을 모두 쳐부수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명맥마저 끊어 후손들에게 송곳 하나 꽂을 땅도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진승과 오광이 한 농군으로 몸을 일으켜 진나라에 맞섰을 때, 천하가 모두 함께 들고 일어난 것은 실로 진나라의 그와 같은 무도함과 박덕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참된 마음으로 육국을 되살리시고 그 후예를 찾아 복위시킨 뒤에 대왕의 관인(官印)을 내리십시오. 그리하면 그 나라의 군신(君臣)과 백성들은 반드시 대왕의 은덕을 우러르고 바람에 쓸리듯 그 위엄을 흠모하여, 한결같이 대왕의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덕의(德義)를 이룸이라, 대왕께서 그와 같이 덕의를 행한 뒤에 남면하여 패왕(覇王)을 일컬으시면, 머지않아 초나라도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우리 한(漢)나라에 조회하게 될 것입니다.”

한왕이 들어보니 그 말이 장중할 뿐만 아니라, 뜻하는 바도 그럴 듯했다. 길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역이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소. 그리하리다. 과인이 명을 내려 급히 관인을 새기게 할 것이니 선생이 직접 그것들을 육국의 후손들에게 전하시오.”

그래놓고는 초나라 대군이라도 물리친 듯 후련해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때였다. 형양 성안에 갇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성밖을 둘러보러 나갔던 장량이 돌아와 한왕을 찾아왔다. 마침 저녁상을 받고 있던 한왕이 장량을 곁으로 불러들이고는 기분 좋게 말했다.

“어서 오시오, 자방(子房). 낮에 우리 막빈(幕賓) 가운데 초나라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 계책을 낸 사람이 있었소. 그 때문인지 저녁상은 밥맛이 달구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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