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부처님 오신날 하루만 산문 개방 봉암사의 5월

  • 입력 2005년 5월 13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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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중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산문을 개방해도 쓰레기 몸살을 앓는다는 조계종 직할 특별수도원 봉암사. 산림유전자원 보전림으로 지정될 정도로 청정한 봉암사 도량을 지키는 일은 종교를 넘어선 국민 모두의 몫이다. 문경=허문명 기자
일년 중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산문을 개방해도 쓰레기 몸살을 앓는다는 조계종 직할 특별수도원 봉암사. 산림유전자원 보전림으로 지정될 정도로 청정한 봉암사 도량을 지키는 일은 종교를 넘어선 국민 모두의 몫이다. 문경=허문명 기자
안개가 잔뜩 끼어 꾸물꾸물하던 날씨가 문경새재 나들목을 지날 때까지도 걷히지 않더니 산문(山門)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맑고 화창해졌다. 백두대간 단전에 해당한다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천년고찰 봉암사에는 짙은 신록과 계곡 물소리가 싱그러워 계절의 여왕 5월을 실감케 했다.

경내에 들어서니 인기척은 없고 들리는 것은 물소리와 새소리뿐이다.

신라 말 고승 지증대사가 창건한 봉암사는 고려 초에는 수행대중이 3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고 긴 세월 동안 성쇠를 거듭하며 선맥(禪脈)을 이어왔지만 무엇보다 1년 중 하루 부처님 오신 날을 제외하고 불자들에게도 산문을 개방하지 않는 조계종 직할 특별수도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사찰이다. 한 달 전, 주지로 부임한 함현 스님은 주지직을 한사코 고사해 주변에서 삼고초려 끝에 모셨다고 한다. 함현 스님은 “한국에서 스님이 되어 공부를 한다면 봉암사를 한번은 거쳐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봉암사는 조계종 스님들의 정신적 자존심”이라며 “이는 봉암사가 광복 이후 한국 현대 불교의 초석을 놓은 ‘결사(結社)’의 성지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광복 2년 뒤인 1947년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청담 자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등 장차 고승대덕이 된 일단의 수행승들은 억불(抑佛)의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대처(帶妻) 불교라는 오욕의 역사를 털고 명실상부 청정비구들로 한국의 선풍을 진작시킬 때라며 봉암사로 모였다.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면서 스스로 밥하고 농사짓고 나무하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청규를 철저히 지켜 나간 이들은 칠성단 산신각 등 미신적 요소가 있는 건물도 허물고 가사, 장삼, 발우도 새로 만들었다. 현재 조계종은 이를 계승하고 있다. 이 봉암사 결사는 6·25전쟁으로 중단되기까지 3년간 이어졌는데 당시 수행했던 스님들 중에서 4명의 종정, 6명의 총무원장이 나왔다.

해마다 여름과 겨울 3개월씩 특별정진하는 안거(安居)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100여 명의 스님이 선방에 들어온다. 봉암사에서 30년간 주석해온 정광(淨光) 선원장 스님은 “나이에 관계없이 해마다 안거 때마다 서로 들어오려는 스님들로 경쟁이 치열하다”고 전했다.

봉암사가 산문을 닫은 것은 1982년. 국립공원 심의위원회가 사찰이 포함된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 스님들이 반대 운동에 나서 국립공원 지정을 철회시키고 이 참에 1년에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수행도량이 꼭 스님들 것만은 아닌데, 너무한 조치가 아닌가”라고 묻자 주지 스님은 “부처님 오신 날 하루 관람객이 2만여 명에 달한다. 이 사람들 밥해주는 것도 큰일이지만, 쓰레기 치우는 데 보름이 걸린다”고 하소연했다. 스님은 “도저히 불감당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올해부터는 등산복을 입거나 관광버스를 타고 떼로 몰려오는 사람들은 제한하기로 했으니 널리 양해 바란다”고 말했다.

문경=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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