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재은]아버지의 氣를 살리자

  • 입력 2005년 5월 13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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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의 정서적 분위기(파토스)는 어깻죽지가 축 늘어진 40대 남성들로 대표된다. 사회의 어느 한구석도 기(氣)가 펄펄 살아 있는 구석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한류 붐을 타고 있는 연예인이나 정보기술(IT) 분야 기업은 예외인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붐을 넘어서는 전략이 있어야 하며, 경쟁 상대와 치열하게 싸워서 이겨야 하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로 남성들, 특히 아버지와 남편들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가 하면 최근 동아일보가 보도했듯(12일자 A9면) 처량하고 불쌍하기까지 한 남성상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기사는 ‘남성의 전화’ 개설 1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상담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제법 잘살게 되면서 여성들의 의식화와 사회 진출이 괄목하게 늘었으며 여권이 신장되고 남녀 불평등도 크게 해소됐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경제력이 커지게 됨으로써 여성 문제는 상당한 정도로 해결된 반면, 상대적으로 남성들의 권리와 지위 향상의 기회, 취업의 기회는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가정-사회서 기죽는 남자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남성들이 아직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남성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손상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가정 안에서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고 발언권도 약화되었다. 옛날의 ‘호랑이’는 신화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오죽하면 집안 내 서열 1위가 아이들, 2위가 아내, 3위가 강아지, 4위가 파출부, 5위가 아버지라는 우스개가 나왔을까. 자녀 교육, 주택 구입, 재테크 등 주요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권은 상당부분 아내에게로 넘어가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가계 지출권은 아내가 행사한다.

필자가 10년 전에 퇴직한 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연구소를 개설했을 때에는 거의 모든 용품과 집기를 여자 제자들이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남자 제자들을 길러낸 다른 퇴직교수들은 이런 경우 대부분 자비로 집기를 마련해야 한다고들 한다. 이유는 남자들은 5만 원 이상을 사용하려면 아내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사례들을 들지 않아도 남자들이 얼마나 기가 죽어서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필자는 인사동에서 10년을 살았는데, 그 거리에서 기가 빠져나가 멍하게 된 남자들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었다. 입성은 초라하고 걸음걸이는 느려 빠져서 활기를 잃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어깨는 처져 있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곤 한다.

왜 아직도 일할 수 있는 저 나이에 방황하고 있어야 하나. 저이에게도 가르쳐야 할 아이들이 있을 것이고 부양해야 할 부모가 있을 터다. 또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할 아내가 있을 터인데 저 모양 저 꼴을 하고 배회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필자의 경우 이미 70대 중반이니 그럴 걱정이란 별로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저렇게 기가 죽어 있는 남자들을 보면 그 가정의 장래와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진다. 대학을 나오고 1000번 이상 이력서를 내보았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읽고는 그에게 용기와 격려를 보내주고 싶었다.

고개 숙인 가장, 어깨 처진 아버지, 걸음걸이에 활력을 잃은 남편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다면 가정과 사회가 얼마나 더 밝아질 것이며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가정에서는 가장의 기를 죽이는 언사를 피해야 한다. ‘돈 많이 벌어오라’ ‘남자가 그게 뭐냐’ ‘다른 집을 좀 봐라’라는 식의 말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家長 무시하는 언사 피해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격려의 말이다. 정부와 사회는 일자리 창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도 패자부활의 기회를 만들어 삶의 의욕을 되살려주어야 한다.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다. 그래야 가정도 살고 아버지요 남편인 당사자도 삶의 보람을 되찾게 될 것이다. 남성이 기 펴고 살 수 있는 사회 만들기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김재은 이화여대 명예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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