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대통령저격 패러디

  • 입력 2005년 5월 13일 18시 21분


코멘트
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신원건  기자
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신원건 기자

《“한 번만 더 민족의 원수 김정일을 두둔했다간 니(네) 머리에 총알을 박아버리겠다.” 지난달 인터넷 매체 ‘독립신문’ 만평코너에 실렸던 누리꾼(네티즌)의 패러디 작품. 섬뜩한 문구와 함께 저격수가 노무현 대통령의 이마를 정조준하는 모습이 담겼다. 영화 ‘스나이퍼’(저격수)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이 패러디에 대해 누리꾼들은 “국가원수에 대한 사이버 저격 행위”라는 비난과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영역”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즉각 수사에 나선 경찰은 패러디 제작자인 대학생과 매체 대표를 협박미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12일 본사 회의실에서 좌담을 갖고 경찰수사의 문제점과 언론의 기본권 침해 감시기능을 진단해 봤다.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전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2주일여 만에 두 사람을 협박미수죄로 검찰에 넘겼습니다. 먼저 경찰의 이런 처사가 과연 온당한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김일수 위원장=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과잉대응으로 생각됩니다. 즉각적인 수사착수, 그리고 군색한 협박미수 혐의 적용 과정을 ‘형법의 적용은 최후수단’이라는 형사정책의 기본 관점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김대중 정권 때도 대통령이 패러디나 개그의 대상이 된 적이 있지만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차원의 제재를 가했을 뿐 형사적 접근은 하지 않았어요. 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베드신 패러디’와 전재희 박세일 의원의 ‘누드 패러디’가 등장했을 때도 경찰은 문제 삼지 않았잖습니까. 피해자가 대통령이니까 경찰이 ‘충성심’을 발휘한 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어요.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대상의 패러디나 만평이 일상화돼 있고 우리의 민주화 발전 수준에 비춰 봐도 경찰의 처사는 시대에 뒤진 듯한 인상을 줍니다.

▽최현희 위원=명예훼손 혐의 여부를 수사하면서 인터넷 매체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것도 과잉대응으로 보입니다. 패러디는 풍자 아닙니까. 청와대 경호실은 아마 대통령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입장에서 총기가 등장한 패러디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상의 댓글을 보면 각종 과격한 표현들이 난무하는 실정인데,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이런 누리꾼들 모두가 협박미수죄로 처벌받는 사태가 벌어지지나 않을지 모르겠어요. 또 문제의 패러디가 보수 성향의 매체가 아니고 진보 매체에 실렸더라도 같은 결과였을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유의선 위원=혐오스럽고 선동적인 증오의 표현을 담고는 있지만 즉각적이고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형사적 책임을 묻는 처사는 과잉 대응이라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은 허용돼야 하고 이런 수준의 패러디 정도는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민주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선정적 패러디 자체를 바람직하게 보지 않지만, 형사적 대응에 나설 때는 신중한 고민이 요구됩니다. 윤리적 비난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미수’라면 피해자인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인데, 표현의 자유만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입니다.

▽이지은 위원=표현의 자유를 공권력으로 제한하려는 형사적 조치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에 역시 동감입니다. 형법으로 재단해서 죄과를 묻는 처사는 마치 누리꾼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속단하는 듯한 위압적 분위기를 풍깁니다. 반면 위협적인 패러디나 댓글을 남기는 누리꾼들의 심리 상태도 개인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표현의 강도가 너무 과격하고 섬뜩한 데다 혐오나 증오의 심리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거든요.

―경찰의 수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데 모두 동의하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언론도 인권침해 여부에 대해 보다 비판적, 분석적으로 접근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지적이 있습니다. 경찰 조치를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도하는데 그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견인데요.

▽김 위원장=표현의 자유 영역을 확보한다는 관점에서 언론의 사명감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위압적인 수사권의 대상이 되도록 방임한 결과 비판의 자유가 위축되는 상황을 낳지 않았습니까. 경찰은 처음에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다가 잘 엮이지 않으니까 궁여지책으로 ‘협박미수’라는 부적절한 법적용을 하고 말았습니다. 누리꾼들의 윤리적 자정노력을 제쳐놓고 즉각 형사적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일련의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도록 언론의 비판과 견제 감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전문기자의 역할이 아쉬웠던 대목입니다.

▽이 위원=관련 보도의 제목들을 살펴보다가 독자의 가치 판단에 앞서 언론이 예단을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협박 미수로 입건’ ‘저격 패러디는 협박미수죄’ 등 제목에서부터 독자는 “아, 저격 패러디는 범죄인가 보다” 하는 선입견을 갖게 만들지나 않았을까요. 객관적으로 보도하려 했다는 흔적은 보이지만 양측의 입장을 함께 제시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누리꾼들이 보다 성숙한 인터넷 문화가 정착되도록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풍토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게 언론의 균형 잡힌 보도가 아쉽습니다.

▽최 위원=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한 매체에서 문제의 패러디가 실린 매체 대표의 견해와 입장을 들어보는 인터뷰를 보게 됐습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주요 일간지들은 입건된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는 기회를 전혀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사실 보도에만 치중하느라 이해가 엇갈리는 양측의 입장을 함께 소개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지는 못했다고 봅니다.

▽유 위원=전문성과 윤리성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방향을 잡아주는 자세야말로 언론의 정도(正道)라고 봅니다. 경찰의 수사를 비판적, 분석적으로 해설하는 전문성과 동시에 표현 수단의 품격을 촉구하는 윤리성까지 지녔다면 균형감 있는 보도가 되었겠지요. 나아가 인터넷 공간에 난무하는 품격 없는 패러디나 ‘육두문자’가 토론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다수의 의견을 잠재워버리는 ‘침묵의 나선 효과’를 낳지 않도록 언론이 제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참석자 명단▼

김일수 위원장 (金日秀·고려대 법대 교수)

유의선 위원 (柳義善·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 학부 교수)

이지은 위원(李枝殷·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최현희 위원(崔賢姬·변호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