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김호]朝鮮 법의학의 ‘억울함 풀어주기’

  • 입력 2005년 5월 13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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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이 요즘 항간에서 화제인 모양이다.

조선의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는 모두 ‘무원록’이라는 법의학 서적에 근거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본래 1308년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저술한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1438년(세종 20년) ‘신주무원록’으로, 이후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구택규 구윤명 부자의 ‘증수무원록대전’으로, 그리고 서유린의 ‘증수무원록언해’로 발전했다.

조선의 법의학이 주목한 검시 방법은 시체의 색깔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서양 의학의 해부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을 중시한 조선의 검시 방법은 매우 색다른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조선의 법의학 서적에는 구타 등의 지표색인 붉은색을 적색(赤色)에서부터 적자색(赤紫色), 적흑색(赤黑色), 담홍적(淡紅赤), 미적(微赤), 미적황색(微赤黃色), 청적색(靑赤色) 등 매우 여러 단계로 분류해 놓고 있다. 이 밖에 푸른색은 독살, 흰색은 동사(凍死), 황색은 병사(病死) 등과 연관돼 있었다.

검시 기술이 색깔에 의존하고 있다 보니 범인들이 살해 흔적을 위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령 흉기로 구타해 살해한 뒤 푸르거나 붉은색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범인들은 꼭두서니 풀을 식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발라 상흔을 제거했다.

이에 대해 조선의 법의학서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흔이 의심스러우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 경험으로 알게 된 산과 알칼리의 중화 반응을 활용한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살해 후 자살 또는 사고사로 위장하는 수법들은 점점 더 교묘해졌고, 이에 따라 법의학의 대처도 한층 정밀해졌다. 조선 초에는 시신이 불에 타 죽은 것인지, 살해된 후 불 타 죽은 것처럼 꾸몄는지를 구별할 때 ‘입과 콧속’의 그을음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의 ‘증수무원록언해’는 입과 콧속뿐 아니라 ‘목구멍’과 머리 뒷부분에 그을음과 재가 묻어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조사하도록 명시했다.

사망 시점을 추정하는 방법과 태도 역시 조선 전기에 비해 정교해졌다.

살찌고 젊은 사람의 시신은 빨리 상하는 반면 마르고 늙은 사람의 시신은 천천히 부패한다든지, 또는 남과 북의 기후가 같지 않으므로 지역의 편차를 고려해야 한다든지, 산중(山中)의 경우 기후 변화가 급격해 시체의 부패 정도에 따른 사망 시간을 추정하기가 어려우므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 등이 그런 사례다.

이처럼 조선시대 과학 수사를 위해 동원된 것이 바로 법물(法物)들이었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이다.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순도 100%의 은비녀가 있다. 이 밖에 술지게미(糟), 식초(醋), 파의 흰 부분, 천초(川椒·초피나무의 열매껍질), 소금, 매실 과육 등과 창출(蒼朮·당삽주의 뿌리), 조각(조角·쥐엄나무의 열매를 말린 한약재) 등의 약재도 사용됐으니 이들 모두는 경험 과학의 소산이었다.

편견 없는 수사, 인체에 대한 지식의 확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신중한 태도…. 이런 것들이 조선의 법의학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 인정(仁政)의 철학이 깔려 있었다. 조선시대 위정자들이 꿈꾸던 ‘무원(無寃)’의 정치는 죽음의 원인을 올바로 밝히려는 과학 정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김호 경인교대 교수·한국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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