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는 日지식인들이 주도한 ‘작전’

  • 입력 2005년 5월 11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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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110주년을 맞아 명성황후 관련 자료가 새로 발굴되고 시해범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아와 사죄하는 등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국내 학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정리한다.

▽시해범들은 누구인가?=일본 낭인(浪人)들로 알려져 있지만 시해범들은 대부분 일본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번에 사죄 방한한 가와노 다쓰미(河野龍巳·84·의사) 씨의 외할아버지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는 당시 서울에서 일본어로 발행되던 한성신보(漢城新報) 주필이었다. 시해에 가담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는 훗날 체신상과 내상을 역임했다. 주모자급인 시바 시로(柴四朗)는 미국 하버드대 유학생 출신으로 이후 10선 중의원 의원이 된다. 궁성 침입과 살해를 담당했던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萬一)는 도쿄대 법학부 졸업생으로 훗날 브라질과 루마니아 전권공사를 역임했다. 이는 을미사변이 폭력배들에 의한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일본 정부와 교감한 극우 지식인의 ‘작전’이었음을 말해 준다.

▽명성황후는 어떻게 시해됐나?=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록한 보고서마다 차이가 나기 때문. 당시 사건을 기록한 자료로는 러시아공사 웨베르의 보고서, 웨베르 공사가 보고서 작성의 기초로 삼았던 러시아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의 현장 증언록, 영국영사 힐리어의 보고서, 시해사건에서 배제된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 법무형판 권재형(權在衡)의 보고서 등이 있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시해범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전인 건청궁에 침입해 황후로 보이는 여인 3명을 살해했으며 △세 번째 여인을 살해했을 때 궁녀들의 흐느낌을 통해 명성황후임을 직감했고 △황후의 일본인 양녀였던 고무라 하루코(小泉花子)를 통해 신원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후가 숨진 곳은?=웨베르 보고서는 황후가 자신의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녕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우치다 보고서에는 곤녕합 뒤편 뜰로 황후를 끌어내 살해했다고 기록돼 있다.

▽시신은 어떻게 처리됐나?=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경복궁 내 우물에 던졌다. 그러나 시신이 떠오르자 다시 꺼내 경복궁 내 송림에서 석유를 붓고 불태운 뒤 궁내 연못에 던졌는데 잘 가라앉지 않자 훈련원 간부였던 우범선(禹範善)을 시켜 시신을 건져내 궁궐 내 송림에 매장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2년 2개월이나 미루다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한 뒤인 1897년 11월 22일 치렀다. 이때 현재의 홍릉수목원(서울 동대문구 청량리2동)에 안치됐던 유해는 고종이 승하한 1919년 경기 남양주시 현재의 홍릉(洪陵)으로 이장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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