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서른,잔치는…’시인 최영미,소설‘흉터와 무늬’내

  • 입력 2005년 5월 11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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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이 넘은 여인이 홀로 거울을 보다가 피부 한쪽에 얼룩처럼 남은 흉터를 본다. 누군가 그게 뭐냐고 물으면 그녀는 “어릴 적에 개구쟁이처럼 놀다가 다쳤다”고만 말한다.

쓰라린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 그러나 이제는 자기 삶의 무늬가 돼버린 것, 그것이 마흔 네 살이 된 시인 최영미 씨가 11일 처음으로 펴낸 소설인 ‘흉터와 무늬’(랜덤하우스중앙·사진)가 그려내고 있는 세계다. 최 씨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시인으로서 이름을 얻은 후 11년 만에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흉터와 무늬’는 이혼한 뒤 혼자 사는 여성 방송작가 정하경이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기 가족에게 어떤 일들이 지나갔는지를 들려주는 ‘가족 소설’이다. 군인이었다가 퇴직해 일정한 직업 없이 사회 변두리를 떠도는 고집 센 아버지, 순진하고 여린 어머니, 그 부모 아래서 자라는 딸들은 루이자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처럼 모두 네 명이나 된다.

소설은 이야기의 정점을 향해 긴장과 갈등을 역동적으로 고조시키기보다는 137개의 짤막하고 시각적인 이야기들을 세월에 따라 아름다운 에세이처럼 배치했다. 일견 평화로워 보였던 하경의 가족에게 흉터를 남기는 일들이 하나둘 벌어진다. 아버지는 1965년 ‘반혁명사건’에 휘말려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한다. 하경의 언니 윤경은 태어날 때부터 생긴 심장질환 때문에 의사로부터 열여섯 살이 고비라는 통보를 받는다. 어린 윤경은 미국에 입양 가서 수술 받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이를 악문다.

하경은 “극장 스크린 바로 앞에 앉아 총천연색을 폭격처럼 쐬는 일을 즐기는” 분방한 소녀다. 탐닉과 몰입이 그녀를 이끌지만 세상은 영화관처럼 기쁨만을 주지는 않았다. 그녀의 독백은 이렇다.

“나는 집을 짓지 않았다. 방을 자꾸 바꿨다. 그를 갈아 치웠다. 나는 머물지 않았다. 어떤 도시에도 어떤 바다에도 길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최 씨는 소설을 완성하기 전에 문인 두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시인 김용택 씨는 최 씨가 원래 붙였던 책 제목인 ‘이름 없는 고통’이 좋지 않다며 최 씨가 지은 다른 제목인 ‘흉터와 무늬’를 추천했다. 김 시인은 “작은 이야기 하나마다 제목을 붙이라”고도 귀띔했다. 최 씨는 또 작가 오정희 씨의 충고에 따라 “원래 작품에서 원고지 100장 이상을 덜어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혹시 최 씨의 자전적인 작품은 아닐까? 그에게 물어보자 “후훗” 하고 웃더니 “그렇게 그럴듯했어요?” 하고 되물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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