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막심이와 어머니

  • 동아일보
  • 입력 2005년 5월 6일 18시 25분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얘기가 아니다. 막심이는 불효막심한 내 딸의 호칭이다. 딸은 내신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척하지만 막심 고리키가 누군지 모를 만큼 책과 담쌓고 살아서 논술시험인들 잘 볼지 걱정되는 ‘저주받은 89년생’이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는 하다. 진짜 막심의 어머니처럼 엄청난 포용력과 사명감이 있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 없어서다. 이맘때면 늘 매스컴을 장식해온 훌륭한 분들의 높고 높은 어머니 은혜를 따라갈 경쟁력도 없다. 은혜는커녕 죽기 전에 어머니라고 불려볼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자기세대가 가장 불행하다고 믿는 법이지만 실험용 모르모트를 낳은 엄마들은 더 불행하다. 자기가 중간고사 못 봐놓고 엄마 때문에 89년에 태어나 이 고생이라고 주장하는 막심이들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유치원부터 여자 수 적다고 대우받고 자라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딸을 둔 엄마는 더 불쌍하다.
▼“엄마 때문이라니까!”▼
특히나 엄마들을 돌게 만드는 건 내 속으로 나온 나 닮은 딸이 제 엄마를 우습게 여길 때다. 공부나 잘하면서 잘난 척하면 참아주겠는데 그렇지도 못한 것이 다 엄마 때문이라고 주장할 땐, 안 그래도 중년의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는 엄마들은 왜 사나 싶어진다.
공부 잘하는 옆집 아이 가리키며 “쟤 좀 봐라” 했다가 딸한테 “쟤네 엄마는 서울대 나왔잖아”라고 핀잔만 들었다는 패전담은 보통에 속한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엄마를 몸종으로 여기는 건 물론이고 모든 잘못의 핑계를 엄마한테 대는 통에 선제공격적 모녀전쟁이 일상이라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이게 우리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에선 엄마와 딸의 언쟁이 5일에 두 번꼴로, 한 번에 15분씩 벌어진다는 조사도 있다. 모자간엔 나흘에 한 번, 6분 정도라니 엄마와 딸의 애증은 세계 공통인 모양이다. 같은 여자여서 피차 너무나 감정적인 데다 엄마에겐 딸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나이고, 딸 또한 가장 만만한 사람이 엄마여서다.
이런 전쟁에서 판판이 지는 사람은 대개 엄마들이다. 첫째는 괜히 딸의 신경 거슬렸다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유서라도 발견할까봐 겁나서고 둘째는 딸이 엄마를, 또는 딸이 제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를 빤히 아는 영악한 딸들은 엄마를 이용하고 또 착취한다. 억울한 엄마들은 너 같은 딸 낳아서 꼭 요만큼만 당해보라고 악을 쓰고.
이 대목에서 고백하자면, “엄마 때문에 미친다니까”와 같은 ‘엄마 탓하기’는 지금 중년의 엄마들이 그 옛날 열심히 써먹던 무기였다. “너 같은 딸 낳아서…” 악담 역시 이젠 노인이 된 엄마로부터 숱하게 들어봤다. 테크놀로지가 암만 세상을 뒤바꿔놓는대도 엄마와 딸은 영원히 안 변하는 애증관계인 거다.
▼있는 그대로 봐주기▼
위대한 어머니를 둔 훌륭한 사람이 아니어도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내 엄마의 작용을 부인할 수 없다. 거꾸로 내가 이 모양인 현실이 엄마 때문만은 아닌 것도 분명하다. 같은 배(腹)에서 나와 똑같이 길렀어도 형제자매가 얼마나 다른지는 자식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절감한다. 부모가 어떻게 기른대도 자식이 타고난 한계를 넘기 힘들다는 뇌신경과학자들의 연구는 보통 엄마들에겐 고마운 소리다.

어머니 덕분이라는 겸양은 미덕이되 엄마 탓이라는 핑계는 안 통했으면 좋겠다. 내 불효막심이도 내 몸에서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평생 할 효도 다했다. 더 이상 바라는 건 어머니 아닌 엄마의 욕심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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