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장영수]초법적 여론재판을 경계한다

  • 입력 2005년 5월 6일 17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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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건 국가건 과거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일본의 과거사 망언과 교과서 왜곡 등으로 촉발된 국내의 반일감정 확산은 과거의 일이 결코 과거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며 올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과거는 끝내 현재의 발목을 잡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해하거나 과거의 과오에 대한 청산을 명목으로 정치적 공방을 확대시키는 것의 폐해 또한 분명하다. 실제로 과거청산이 독재세력에 의한 반대파의 숙청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예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려해야 할 것은 과거청산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함으로써 우리 국민 스스로가 과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우리 학생들이 조국의 현대사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1919년의 3·1운동에 대해서도 그 소극성을 비판하면서 무저항 비폭력을 ‘무기력함’으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1960년의 4월혁명과 1987년의 6월혁명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부족도 적지 않아 보였다.

▼우린 청산할 과거만 있나▼

하지만 생각해 보자.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가 가운데 우리나라만큼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나라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러한 발전의 원동력은 우선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에 있었다. 나아가 불의에 맞서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점에 있었다. 그러한 저력이 현재의 우리를 가능케 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과거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4월혁명과 6월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에 못지않은 의미와 비중을 갖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를 단지 청산 대상으로만 생각할 경우, 자칫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오히려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과거를 무조건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광복 후 지난 60년간 많은 발전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 많은 문제와 모순, 고민들을 쌓아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르게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는 미래로 향한 발전에 늘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번쯤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할 필요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사를 정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신중함이 요청된다. 특히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과거사법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법률의 공식 명칭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지만 자칫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에 대한 진상의 규명이 오히려 갈등과 반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조사 대상의 범위, 조사위원회의 구성 및 권한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물론 과거 공권력의 남용에 의해 억울함을 당했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절차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미 시효의 완성 등으로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한 사건들에 대해서 가해자를 밝혀내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국가기관의 활동이 아닌 학문적 연구에 의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형벌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국가기관이 조사한다는 것은 자칫 초법적인 여론재판을 통해 오히려 법치국가적 질서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과거사법은 국회를 통과했고, 6개월 후에는 시행에 들어갈 것이다. 결국 남은 문제는 과거사법에 따른 과거사정리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그 활동이 어떻게 공정하고 적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느냐에 있다고 할 것이다.

▼과거사委위원 역할 중요▼

이는 위원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는 국회와 대통령, 대법원의 몫이기도 하며 위원회의 활동을 계속 지켜보게 될 국민과 언론의 몫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위원으로 임명될 분들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섣불리 과거를 청산하려고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미래까지도 청산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장영수 고려대 법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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