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통일 눈물의 사모곡 “어머니를 어떻게 가슴에 묻을지…”

  • 입력 2005년 5월 6일 02시 11분


코멘트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이 4일 밤 모친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지만 정 장관의 모친은 6·25전쟁 등의 와중에서 네 아들을 잃고 간난신고하며 살아온 이여서 사연을 듣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사진공동취재단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이 4일 밤 모친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다.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러하지만 정 장관의 모친은 6·25전쟁 등의 와중에서 네 아들을 잃고 간난신고하며 살아온 이여서 사연을 듣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사진공동취재단
“어머니를 어떻게 가슴에 묻어야 할지….”

4일 83세 노모를 여읜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아온 많은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고인(이형옥·李衡玉)도 ‘간난의 일생’을 보냈다. 고인의 남편은 26세 때 면장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 하지만 정 장관의 고향인 전북 순창 회문산 일대는 소설 ‘남부군’의 무대가 될 정도로 좌익이 활개 치던 곳이었고, 고인은 6·25전쟁과 좌우 대립의 와중에서 아들 넷을 모두 잃는 참화를 겪었다.

고인도 남편과 함께 북한군에 잡혀 몰살 위기에 처했다가 집안일을 거들던 머슴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정 장관을 낳았고. 이후 아들 셋을 더 두었다. 그러나 정 장관 형제들은 형이 넷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1969년 부친이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몰랐다고 한다.

정 장관의 지인은 “정 장관이 남북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인 데는 비극적인 가족사가 깔려 있다. 정 장관의 부친은 돌아가기 직전 가족사를 들려주며 ‘절대로 북한에 대해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에 들어간 정 장관이 1973년 유신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투옥되자 고인은 “아들을 망칠 수 없다”며 가산을 정리하고 상경해 서울 성동구 사근동에서 두 칸짜리 셋방살이를 시작했다. 방 한 칸에서 스웨터를 짜는 가내 봉제업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다른 방 한 칸에서 4형제를 키워 모두 대학에 보냈다. 정 장관 형제들은 어머니가 짠 스웨터를 평화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성모병원은 4, 5일 정관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